일주일 후 같은 시간에 도형은 남자를 찾아갔다.
남자를 찾아가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지만, 도형은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었다.
도형은 전에 보았던 흰색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젊은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긴 머리에 짙은 눈썹,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
청년은 도형을 보고 당황했다.
“진짜 또 찾아오실 줄 몰랐는데….”
도형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자꾸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네요.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청년도 도형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늘은 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네요. 몸은 괜찮아지셨어요?”
도형은 그동안 걱정했다는 듯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청년은 표정 없이 대답했다.
아직도 그의 얼굴에는 죽음을 갈구하는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도형은 생각했다.
오래전 도형이 20대 초반이었을 때, 그의 친구 두 명이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한 친구는 지금까지 잘살고 있지만.
도형은 그 당시 자살의 원인을 두 가지로 분류했던 기억이 났다.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외적 요인은 금전적인 이유가 첫 번째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자살하게 되는 내적 요인들을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논문을 쓰듯이 분석해 놓았던 기억은 있지만, 도형은 지금 자세한 내용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도형도 그 당시 한동안 죽음을 갈망한 적이 있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격한 슬픔을 견뎌내기 어려웠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인간 존재의 이유 없는 슬픔과 허무함을.
“잠깐 들어오실래요? 아니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좋겠네요. 1층에 조그만 휴게실이 있는데 거기서 차 한 잔 타 드릴게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청년의 목소리에 삶의 의지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귀찮게 해드리는 거라면 그냥 돌아가도 됩니다. 전에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는지 확인해 보려고 온 것뿐이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오셨으니 차 한 잔 대접할게요. 별건 아니지만.”
“그럼 감사하죠, 지금 내려갈까요?”
“네, 1층이에요.”
도형과 청년은 건물 1층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내려갔다.
세련된 공간은 아니지만, 싸구려 가구들을 이용하여 곳곳을 애써 꾸며 놓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약간 색이 바랜 4인용 흰 테이블이 세 개 놓여 있고, 파이프를 구부려 만든 것 같은 의자가 테이블마다 4개씩 놓여 있었다.
커다란 종이 상자에는 녹차나 둥굴레차 같은 티백이 여러 종류 섞여 있었고, 더운물이 나오는 조그만 정수기가 다소 높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도형은 의외로 이곳에서 편안함과 아늑함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장소네요.”
도형은 생각 없이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마침 아무도 없네요. 이쪽으로 앉을까요?”
청년이 벽 쪽에 있는 테이블로 인도하면서 다시 물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커피믹스, 녹차나 둥굴레차 중에 고르세요. 물론 다 싸구려 제품이지만 먹을 만해요.”
“커피믹스 좋아요.”
청년은 하트가 그려져 있는 흰 종이컵에 커피를 두 잔 들고 왔다.
도형은 어떤 말로 어색한 상황을 벗어날지 생각하고 있었다.
“몸은 어떠세요? 정말 괜찮아지셨어요?”
도형이 머리를 만지며 어색하게 말을 시작했다.
“네, 사실 지난번에도 그냥 정신이 좀 없었을 뿐이에요.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었고요. 그때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누가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청년의 목소리는 아직도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자신이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도형은 미안한 맘이 들었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단지….”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 죽으려고 했던 것 맞아요.”
청년은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청년의 갑작스러운 말에 도형은 놀랐다.
타자에게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랬군요.”
도형은 그에 말에 놀랐지만, 애써 담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아내와 교수를 생각하며, 자신이 죽음이라는 단어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도형은 작은 미소를 지을지 생각하다, 그냥 무표정으로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매일 기분이 조금씩 변하거든요. 그날….” 청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날은 좀 최악이었죠.”
청년의 미간에 약간 주름이 잡히는 것을 도형은 볼 수 있었다.
“혹시 제가 죽고 싶은 이유까지 알고 싶으신 건가요?”
또다시 청년은 도형은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을 했다.
도형은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알고 싶어요. 아니다,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적은 저도 처음이거든요.
모르는 사람을 제가 먼저 찾아간 것도 처음이고,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하여간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해드린 거라면 차 한잔 마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청년은 할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듯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다른 이야기로 말을 시작했다.
“왜 병원에 계세요? 누가 편찮으신가 봐요?”
“아내가 두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식이 없어요.”
“그럼, 식물인간?”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도형은 잠깐 비친 청년의 미소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멋진 미소를 지닌 청년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괜찮아요.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죠. 의사들 말로는 깨어날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계속 두고 보자는 얘기만 하고 있어요. 희망을 품고 기다려봐야죠.”
도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병실에서 소설을 쓰고 있고요. 저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내 때문에 휴직을 한 상태지만. 제 이름은 이도형이고요.”
“아, 선생님이시구나. 그럼, 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네, 편하실 대로 하세요.”
“선생님이신데 글도 쓰시는구나!”
청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계속 쓴 건 아니고요. 십 년 전쯤에 짧은 소설 하나를 써서 신문사에서 하는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운 좋게 입선해 등단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거의 글 쓰는 것을 잊고 살았는데 아내 사고가 나던 날부터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뭔가 멋진 글을 써서 아내가 깨어나면 보여주려고 결심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한 줄도 못 쓰고 있다가 우연히 그쪽이 옥상 난간에 서 있는 걸 본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쪽 사연을 들어보면 글 쓰는 데 혹시 도움이 될지 하는 생각을 해 본 것도 사실이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쪽이 다시 뛰어내릴까 봐 걱정되거나, 살리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여기 온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난번 흰색 페인트 온몸에 바르고 누워계신 모습을 보고 좀 많이 놀랐어요. 그런 모습은 생전 처음 봤거든요.”
도형 역시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행한 두 남자가 마주하고 앉아 각자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청년이 정적을 깨고 말을 시작했다.
“사실은 저도 죽기 전에 이 세상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에 옥상에서 확 뛰어내리지 못한 이유도 아마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요.”
“오, 정말이요? 그럼, 우리의 만남이 운명적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하늘의 별을 찾아보다가 그쪽을 발견했어요. 그쪽이 나에게 별처럼 나타났어요.”
도형은 자신의 유치한 농담을 금방 후회했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또 사과하였다.
청년도 작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또다시 1분 정도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청년도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테이블 위에 작은 인조 화분의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아직 슬픔이 떨어졌다.
“저 혹시 선생님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으세요?”
“네?”
도형은 청년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었지만, 다시 한번 듣고 싶어 잘 못 알아들은 것처럼 반문했다.
“UFO나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도형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계속되는 질문에 도형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답하였다.
“별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냥 작은 미생물 정도의 생명체는 있을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데요?”
도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이미 미쳐버렸는지도 모르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제가 지구인이 아니라 먼 외계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아는데 그런 생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아”
도형은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실 수 있어요?”
“정말 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세요?”
청년은 약간 의욕이 생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재미있는 이야기잖아요. 듣고 싶어요.”
도형은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이야기를 듣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되시면 그냥 일어나서 가버리셔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청년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 보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청년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아픈 기억을 애써 꺼내야 하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