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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쌤 Jan 03. 2024

나 때는 말이야,  너희들 나이였을 때 인도에서 살았어

거침없는 중2병 소녀가 인도에서 살아남는 방법

Prologue-: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수업 중 인도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를 가끔 해주곤 한다.

"헐 진짜요? 오른손으로 밥 드셨어요?"

"그럼 왼손으로는..."

"어떻게 부모님께서 선생님 혼자 인도에 보낼 생각을 하셨대요?"

"선생님 손으로 카레 어떻게 먹었어요?"

"거기 원숭이 많아요?!"나 때는 말이야,  너희들 나이 때 인도에서 살았어

나 때는 말이야,  너희들 나이 때 인도에서 살았어

하며 놀라거나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여주기 일쑤이다.

그리곤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왜 하필 인도예요?"

그 질문에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간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인도 벵갈루루 공항에 서 있더라고"


한 날 아버지께서는

"다애야, 너 인도 갈래? 인도에 Stanes라는 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에 아빠의 친구의 자녀들이 유학 생활을 하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대답했다.

"어 갈래"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기에 그에 관한 결과가 이렇게나 견디기 힘들지, 또 앞으로 어떤 사건들을 마주할지 그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아주 들떠 있었다.


인도로 가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부모님은 나를 그곳으로 보내기 위해 아주 분주해지셨다.

아버지는 남쪽 인도 'Ooty'에 거주하고 계시는 한국 선교사님 부부를 소개받아 내가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셨다.


그 선교사님 부부는 나의 Local guardian (현지 보호자)이 되어주신 아주 고마운 분들이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 학교 행정을 맡으신 모든 분의 도움으로 유학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인도로 가기 전 한국에서 실컷 놀고 가라며 출국 날 3주를 남겨두고 학교를 그만 다녀도 된다고 하셨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마지막 등교 날이 되었을 때

반 친구들이 나에게 편지와 선물을 주며 작별 인사를 구했다.

그때 친구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왜 울지? 하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철없는 기분을 즐기기에 바빴다.

그런 나를 본 엄마는 3주 내내 내게 "너 정말 인도 가서 생활 잘할 수 있겠어?"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셨다.

아마 철없이 행동하던 내 모습을 굉장히 못 미더워 하심과 동시에 걱정이 가득하셨을 것이다.

한국을 뜨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 대신 짐을 싸주기에 바쁘셨고 내 휴대폰은 친척들과 친구들의 연락에 바쁘게 울려댔다.

드디어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찌 되었건 외국을 간다는 생각에 설레어 밤잠을 설쳤다.


그날 새벽 3시,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대구에서 인천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내내 엄마는 내 손과 얼굴을 계속 어루만져 주셨다.

마치 영영 못 볼 사람 대하듯이,


공항에 도착하니 아버지 친구분의 자녀인 휘진, 성민 형제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인천 공항에는 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도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 외국으로 간다는 것에 무척 들떠 있었다.


여러 짐을 수화물로 맡기고, 카운터에서 항공권을 확인해 주었다.


인천 공항에서 방콕을 도착으로 방콕에서 벵갈루루로 가는 비행기를 거쳐야만 비로소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


짐을 맡기고 나니 비행기 출발 시각이 조금 남아 있었다. 기내로 끌고 갈 캐리어의 짐을 다시 정리하다가 정리가 잘되지 않은 것을 목격한 엄마는 늘 그렇듯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후 어머니는 그 잔소리를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때 동생은 울음을 터트렸고,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어머니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나는 검색대로 들어가기 전 크게 손을 저으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가족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2009년 6월, 철없는 15살 사춘기 소녀는 가족들과 떨어져 인도라는 먼 타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아버지의 권유에 아무 생각 없이 가겠다고 한 그 말이 그녀를 인도 벵갈루루 공항까지 오게 하였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신 선교사님께서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토닥여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에 왔다는 것에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자만했던 나를 비로소 탓할 수 있었다.

공항 밖에서 느낄 수 있었던

눅눅한 공기, 처음 맡아보는 특유의 냄새, 경적을 시끄럽게 울려대던 차 소리,

그리고 굉장히 까무잡잡한 인도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자

'아.. 진짜 인도로 와버렸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하며 온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헤집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라는 문구가 딱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선교사님 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오는 것을 몰래 삼키기를 반복했다.

결국 댁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눈물을 멈추려 애썼으나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울음에 같이 갔던 휘진, 성민 형제들은 당황했고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전화하고 싶었지만, 당장 전화를 할 방도도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내가 앞으로 지낼 학교로 출발해야 하니 빠른 취침에 들어섰다.

(차로 무려 8시간이나 걸린다.)

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중2병, 처음으로 생각 없던 나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15살,

첫 독립 지역은 인도

이런저런 생각에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과연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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