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아줌마의 불안증 투병기 11
지난 상담에서 어린 시절, 어른들이 엄마를 만나면 "아들을 낳아야지", "집에는 아들이 있어야 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언제부터인지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딸 둘이었던 우리 집에 온 어른들은 항상 그런 이야기를 엄마와 아빠에게 했고, 부모님들은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다짐했다.
'저 말을 후회하게끔 어떤 아들보다도 훌륭한 딸이 될 거야!'
그리고 나 스스로 잊을 까 봐 속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상담에서 다시금 살아났다. 무의식에 가라앉았던 것이 수면으로 올라온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씩 생각이 나면서, 점점 그때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마치 거대한 뱀과 같은 연기처럼 나를 싸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10살 나영이는 나를 혼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잊지 말라는 데 잊었어! 그럴 줄 알았어! 잊지 말고 열심히 해서 성공을 했어야지! 지금 이렇게 아줌마로 살면서 현재에 만족하고 있을 때야? 너 훌륭한 딸 안 할 거야? 엄마를 위한 복수 안 할 거야!"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고 현재의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울감과 불안이 밀려왔고 또 숨을 쉴 수 없었다.
겨우 나를 달래며 잠들었고, 다음날이 되었다. 10살 나영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진 않았지만 패배감과 무능력함, 죄책감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온몸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10살 나영이에게 마흔 넘은 나영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거 같다고 말이다. 그 아이는 엄마를 곤란하게 하는 어른들이 싫었던 거다. 우리 엄마를 탐탁해하지 않았던 할머니와 친척들의 말투에 화가 났던 거다. 그래서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 어린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던 거다. 그 마음이 너무나 안쓰럽고 예뻤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영아,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구나? 마음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을 도와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도 아들 낳으라는 주변의 이야기 들었지만 지금 우리 딸이 잘 크는 거 보면 정말 행복하거든! 그 참견들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러니 너도 엄마가 마음 아플까 봐 화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그때 그 다짐도 너무나 기특하지만, 네가 생각한 그런 성공은 사실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굳이 할 필요도 없고... 네가 그렇게 성공하지 않아도, 그걸 위해 애쓰지 않아도, 네가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 엄마, 아빠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그러니 더 이상 화내지 말고 걱정하지 마. 네 다짐을 잊어서 미안해. 이제 잊지 않을게. 네 다짐도 네 마음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가슴 한 구석에 박하사탕이 들어간 듯 시원해졌다. 그렇지만 나의 불안 요인이 이 대화를 통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연한 성공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은 깎여나간 거 같다. 여전히 불안의 부스러기도 핵심도 남아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10살 나영이 너무 이쁘다. 상상 속에서라도 꽉! 안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