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가 복직한 8월부터는 내가 서하의 등원을 시켜주고 있다. 잠에서 깨는 동시에 엄마 어디가를 외치는 모습에, 그 초조와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회사에 유연근무제를 신청하였다. 다문 한 시간 늦은 출근이지만 바쁘게 움직이면 그동안의 서하의 아침 일과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도 등원시킬 수 있다.
유리가 출근하는 7시 반부터 어린이집에 도착하는 9시 반까지는 세상에 나와 서하만이 존재한다. 그 세상은 짧은 행복과 긴 번민의 세상이다. 불가에서는 내심외경이라 하여 내 마음이 곧 바깥의 풍경이라 가르치는데, 그 시간의 풍경은 탄압과 저항의 신(scene)이다. 반드시 해야 할 과업들이 있는 나의 마음은 물러설 곳이 없고, 웃긴 일이지만 서하의 마음도 물러설 곳이 없다. 설득과 협상을 오가며 밥을 먹이는 일도, 앙 다문 입술을 비집고 이를 닦이는 일도, 적절한 시기에 응가를 부탁하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물론 여유가 있다면 육아를 놀이로 승화시키는 TV 속 아빠들의 재주를 부려보겠으나 시간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이 불가항력 속에서 나는 이제 육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열불 나는 것이 육아의 본질(本質)이라면 열불을 참는 것이 육아의 업(業)일 것이다. 화가 많은 유리가 지난 2년 동안 서하를 홀로 키운 것이 새삼 대견스럽다.
더욱이 육아는 복잡하고 행로가 제멋대로여서 읽는 이가 있다면 그 서사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방금 전 식탁의자에 앉아 아기새처럼 호박샐러드를 받아먹던 아이가, 좀 뒤에는 바닥에 머리를 찍고 아빠 품에 안겨 통곡을 한다. 방금 전 아이를 안고 엄마보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아빠는 조금 뒤 다시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지 않겠다며 절교를 강요한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이처럼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며 기력을 모두 소진해 갈 때 쓰는 말이다. 특히 아빠의 육아는 좀 더 비극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일 아침을 또 기다리는 것은 육아의 모순(矛盾)이다. 육아의 모순은 찰나의 행복이 긴 번민을 이겨내는 데 있다. 나아가 육아는 늘 애틋하게 끝나기에 시작은 언제나 찬란하다. 잠들기 전 아빠 손을 꼭 잡고 자기 발에 비벼보는 서하의 모습에 내일은 더 찬란한 아침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빠가 잠에서 깨며 엄마를 찾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와 서하의 8월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