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을 샀다. 제목은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누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은 박완서 선생의 글이 좋아서, 선생의 저서를 검색해보다 마침 며칠 전에 내가 인용한 시인의 문장과 꼭 같은 제목의 산문집이 있어 구매한 것이다. 선생의 글은 피천득 선생의 글을 닮았다. 말인즉슨 내가 좋아하는 글인데, 무엇이 좋냐고 묻는다면 정직하고 쉽게 쓴 글임에도 아름답고 울림이 있는 글이다. 생활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감명이 오래가는 글이요, 눈에 띄는 문장 대신 책 한 권이 온전히 기억에 남는 글이다. 가까운 이들에게 늘 피천득의 <인연>을 추천하였는데, 박완서 선생의 글도 그에 버금가게 좋았다.
선생의 글에 이토록 감복하는 이유가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선생의 연륜과 권위를 생각하면 그의 글을 좋아함으로써 얻는 '반사적 영광'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똑같은 문장이라도 성경의 말씀일 때 공연히 심정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문장 자체에 더 천착하는 편이다. 즉, 필자의 배경이나 글의 주제보다도 문장을 더 오래 기억하고, 한 편의 글도 굳이 문장의 집합으로 분해하여 감상하는 버릇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도 연출이나 반전 대신 배우의 연기에 더 집중하는 것을 보면 이는 약간의 취향 같기도 하다만, 문장에 대한 집착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
(이런 말은 작가들이나 하는 말이지만)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군대에 가서였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독서를 나는 군대에서 했고, 그때 알게 된 작가들의 문장을 모방하며 시작한 것이 나의 첫 인문학적 글쓰기였다. 가령 성석제의 소설을 읽다 보면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조선 남자들은 군대와 축구 이야기를 양로원에 가서도 하고, 조선의 여자들은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라면 양로원에서도 이를 간다고 한다. 그런데 군대에서 라면 먹은 이야기라면 어떨까." 이 문장이 몹시 재밌었던 나는 '라면 먹은 이야기'만 '반말한 이야기'로 슬쩍 바꾸어, <군대에서 반말했다>라는 짧은 소설을 하나 썼다.
이후에도 나는 하나 또는 두 개의 문장을 모티브 삼아 글을 썼고, 이처럼 글의 계기가 되어 줄 문장을 수집하기 위해 야밤에도 플래시를 켜고 독서에 몰두했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는데, 그것을 세계 명저의 반열에 올려놓은 숱한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단 한 문장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어빠진 인간들이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해놓은 것보다 낫습니다." 생활을 마구 해쳤던, 이 한 문장을 가지고 나는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닮아 있다>라는 제법 긴 자전적 소설을 썼다. 당시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은 글을 쓰려 짝사랑을 했다.
사랑이 끝나고 전역할 무렵 나는 행정실 프린터로 잔뜩 출력한 문장들을 전역증과 함께 주머니에 넣어 왔다. 그리고 복학을 해서는 출소를 한 것처럼 혼자 진지해져 독서와 글쓰기에 더욱 천착하였는데, 당시 싸이월드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썼던 많은 글들이 있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마저도 절반은 그때 주머니에 넣어온 문장들로 생성된 초심자의 습작들이. 며칠 전 우연히 발견하였지만, "저는 이 소설이 아주 현실적이면서 참신하고 소박한 것, 그러면서도 정교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런 점에서 또 주인공을 깊이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는 문장처럼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 욕심껏 늘어놓은 단어의 조합들이.
거대한 부끄러움에도 나름의 추억이라 남겨두었던 그 많은 글들은 후에 싸이월드가 문을 닫으며 함께 퇴장했다. 나는 구태여 백업을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이십 대의 낭만과 과잉이, 짝사랑이, 현란하고 장황했던 형용사들이 모두 떠났다. 그 이후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군대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다 떨어지기도 했고,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의 현타였을까. 무엇보다 그동안 쓴 글들이 어떤 인식도 어떤 고백도 아니요, 그저 더 압도적인 문장을 찾기 위한 경주였다는 사실이 슬펐기 때문이다. 유명한 어록이지만 나는 글을 썼으나 정작 한 번도 글은 쓰지 못했다.
이후 유리에게 가끔 쓰는 편지 외에는 글을 쓰지 않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세어보니 어느덧 10년이었다. 글을 쓰는 대신 매일 마지막 남은 마음의 여유는 세상의 가십이나 짤막한 유튜브 영상에 주며 살았다. 그렇게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문득 삼십 대의 보잘것없는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2년 전 태어난 딸 서하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한편으로는 옛 청춘의 치기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적이면서도 참신하고 소박한 것"이 의미하였던) 바로 '낭만'이다. 복잡했던 이십 대의 문장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진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낭만의 정신일 것이다.
미지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활동에는 낭만이 있다. 누군가는 이상하거나 가소롭다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제목만 보고 낚였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이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갈 것이다. 이에 나는 짐짓 무심한 체했지만 실은 나와 닮은 누군가가 와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의 지나가는 인사에 더 좋은 글을 맹세하기도, 조회수 1이 일독을 의미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가끔은 쌓이는 조회수로 글의 서열을 매겨보기도 했다. 이처럼 세간의 관심, 아니 세간의 관심을 향한 상상은 나름의 낭만이 되어 글쓰기의 훌륭한 동인이 된다. 이는 내가 이십 대에 대학가가 아닌 방구석에 천착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게 내가 삼십 줄에 블로그와 브런치를 시작하는 이유다. 그 옛날 피천득 선생은 수필을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 하였는데, 올해로 꼭 서른여섯이 되었다. 부끄러움도 낭만이 되는, 여전히 심오한 인식은 없다만 자기 생각 정도 고백할 줄 알게 된 나이. 그래서 다시 써본다. 이제 피츠제럴드처럼 쓰지는 못하지만, 박완서 선생의 미(美)를 좇으며 차분하고 정직한 글을. 이십 년 뒤 서하에게 물려줄 삼십 대의 낭만과 노력을, 부정(父情)을, 문장의 역사를, 내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