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훈은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회사에 있다고. 그것은 일 중독자의 허언이었을까. 아니다, 박석훈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게으른 사람이었다. 형은 대학 시절 강의실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애초에 기숙사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 은신처를 찾아가 오늘 시험이었는데 왜 나오질 않았냐 물으면 이불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형은 나름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오랜 고시 생활 뒤 지금은 금융위 사무관으로 일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그곳에서도 형은 최대한의 사생활을 고수하며 이불 안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스키장에서 긴 휴가를 보내며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늦잠과 휴가 대신 답 없는 보고서와 끝 없는 야근에 묻혀 임박한 기한을 향해 활강할 때가, 알고 보니 가장 가슴 뛰던 날들이었다고.
회사에서 얻는 보람과 열정이 견인하는 성취감을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그 희열에 게으른 천재가 눈밭에서 각성하게 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싫든 좋든 우리의 인생은 출근과 퇴근 사이, 또는 퇴근과 출근 사이에 있지 않은가. 다만, 나 같은 지독한 개인주의자에게 회사는 인생의 의미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회사 속 자아실현은 성실한 자가 아닌 충정한 자들을 위한 몫이고 보상이므로.
그렇게, 그저 급여를 받기 위해 다니는 회사는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 것처럼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삶의 의미를 묻는다, 찾는다. 가족은 어떤가. 개인주의도 가족만은 늘 예외가 아니었던가. 충정한 작가의 블로그는 어느새 딸의 인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서하의 꿈을 위해 사는 인생은 결국 서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종교는 어떤가. 현대사회가 최고로 평가하는 가치들도 그 안에서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지 않은가. 매주 순종의 대가로 얻는 고요한 마음의 풍경은 늘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이에 영선이를 따라 교회도 몇 번 나가보았지만 신념은 동경만으로 살 수 없는 것. 신실한 사람들의 우렁찬 찬송가가 울릴 때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이처럼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늘 헛된 순환을 반복했다. 사실, 무엇을 위해 살지 않겠다면서 인생의 의미를 얻겠다는 노력은 애초에 괴로운 시도일지 모른다. 반대로 충정이 강한 사람들은 아마도 더 쉽게 행복할 것이라, 나는 추정하고 있다. 이쯤 되면 구태여 인생의 의미를 찾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방법이다. 실존은 언제나 본질에 앞서는 법이므로.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 출근과 퇴근 사이에서, 인생의 의미를 애써 외면하며, 충정도 신념도 없이. 목공이 만든 의자가 아니라 그저 앉기에 적합하여 의자가 된 그루터기처럼, 그렇게 실존하고 있다. 좋게 보면 매일매일이 선택의 연속이다. 회사에 충성하지 않으니 지금처럼 블로그를 하고, 신앙이 없으니 일요일에는 공을 차러 간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시간보다 이유 없이 웃는 시간이 훨씬 많다. 이는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은 퇴근하는 길이, 잠이 들기 전이, 때때로 공허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의 선택은 허름한 일상이 되어, 익숙한 피로가 되어, 오늘도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어제는 좀 더 사랑하는 게 좋았을까. 똑같은 표정을 지은 오늘의 인생은 약이었을까, 밥이었을까. 이불 밖에서 서성이는 내일은 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다시, 언제나 헛된 순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