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무솔 Aug 24. 2023

날카로운 첫 회사의 추억

아빠 자격 취득기

시작은 좋았다


 자랑스러운 OO그룹의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탓에 내 삶에서 회사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보다도 컸다. 입사 동기만 70명에 그룹사 동기가 400명에 달했고, 그걸 또 금이야 옥이야 한 달이 넘도록 연수를 시키니 지난 2년 여 동안 당한 취준생의 서러움은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물론 그때가 회사생활에서 제일 좋은 기간이었다).


 현업에 배치된 후에도 뭔가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사업장에 배치를 받았고, 가고 싶은 팀선배가 그만두는 바람에 입사 6개월 만에 원하던 팀으옮겼다. 옮기는 과정은 짧고도 강렬했다. "OO아, 우리 팀에 와서 한번 일해볼래? 여기서 성장하려면 어차피 우리 쪽 와야 돼." 애초에 바라는 팀이었던 데다가 신입사원이 뭘 알겠는가. 나는 애써 고민하는 척하며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한데, 그래도 지금 맡은 일이 있으니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했고, 적당한 이미지 관리가 통했는지 바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령받은 팀은 군대보다 더하다는 그룹사의 문화를 앞장서서 이끄는 아주 모범적인 팀이었다. 상명하복이 미덕인 곳에서 나는 가장 힘없고 바쁜 막내였고 곧 그만둔 선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경직된 조직의 장점이 대부분 그렇듯 직급이 올라갈수록 어떻게 형편이 나아질지가 뻔히 보였기에 하루빨리 막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오욕의 세월을 견뎌냈다. 결국 2년 만에 바라고 바라던 막내가 들어왔고, 나의 오랜 기대와 다르게 그는 굉장한 MZ였다.


제가요? 왜요?(탑건, 1986)


낀 세대의 웃지 못할 부조리극


  당시 우리 팀 막내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점심시간 30분 전부터 그날의 메뉴 후보들을 보고하고, 10분 전부터 미리 차를 대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후배는 우리 팀의 문화를 단 한마디로 개혁했다. "아, 전 점심 안 먹습니다 선배님 ^^"(…) 돌쇠처럼 듬직한 외견을 가졌기에 완전히 우리 팀이 원하는 인재상이라며 기대를 모았던 그는 한 마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막내를 대하는 선배들의 태도였다. "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당장이라도 사무실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빠르게 세대가 변했음을 수긍했고, 나는 마지막 세대로서 다시 메뉴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억울했지만, 이미 컨셉을 잡은 후배에게 나 역시 일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탁한 눈의 광인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여차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될까 하는 마음에 눈치를 본 적도 많았다. 선배들은 나까지 엇나갈까 두려웠는지 하나마나한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야, 저렇게 회사생활하면 되겠냐? 쟤는 좀 있으면 딴 데 가고 도태되는 거야."


 그러나 딱히 이 팀에 계속 남아있을 메리트는 없어 보였다. '그냥 저렇게 도태되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은데.결국 일을 배우고 싶다는 핑계로 더 페이퍼워크가 많은 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조금은 합리적인 환경에서 커리어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남자 직원 비율이 95%에 달하는 완벽한 남초 회사에서 어딜 가도 낙원은 있을 수 없었다. 특히 내가 몸 담은 인사노무 직무는 계속해서 직원들과 소통을 해야만 하는 자리여서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누구랑 얼마나 친한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가 능력으로 환산되곤 했다. 오늘 마시는 술이 많아질수록 내일 마실 술자리는 늘어갔고 나는 자연스레 반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갔다.


 난데없이 3류 치정극의 주인공이 된 적도 있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A, B 각각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B와 술을 마시는 나를 목격한 A가 "너, 그렇게 아무 하고나 술 먹는 사람이었어?"를 시전 한 적도 있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라도 흘렸어야 할까.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SBS 아내의 유혹, 2008)


 회사생활의 대부분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아내와의 다툼도 잦아졌다. 아직 신혼인데 제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더 적은 판국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너무 취한 나머지 대리운전을 부른 기억도 없이 집 앞 주차장에서 잔 적도 있었고, 자정을 넘길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 밖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 회사 말고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상상할 수 없었고, 취업준비라는 그 혹독한 짓을 다시 할 용기도 없었다. 게다가 수년간의 가스라이팅(ex. 너 도태될 거야?) 탓에 지금 겪는 고난들이 나중에 영광의 상처가 될 것이라는 왜곡된 믿음도 있었다.



아직 아빠는 아니지만 화가 나네


 스스로의 세뇌에도 지쳐갈 때쯤 내가 떠난 팀의 선배가 육아휴직 사용으로 한바탕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결국 6개월 간의 휴직을 선택한 선배가 복귀 후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명색이 인사를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법에서 보장한 육아휴직을 쓰는 데도 저렇게 핍박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까지도 사가(社歌)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애사심이 강한 나였지만 그냥 싫은 사람 몇몇 때문이 아닌, 회사 자체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울분과 회의들을 터뜨릴 명분을 드디어 찾았는지도 모른다.


 신입 때도 맛보았던 선배들의 비겁한 회유는 이번에도 계속되었다. "넌 좋겠다? 쟤 딴 팀가고 얘는 육아휴직 써서 나가리고, 가만히 있어도 평가 좋게 받고 승진 바로 하겠네?" 예전 같으면 솔깃해서 또다시 미련하고 우직하게 회사생활을 했을 나였겠지만 이제는 이런 말들의 의도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만은 제발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 남아서 순종해 달라는 애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치 선심 쓰듯 이죽거리는 이 부당한 태도까지 받아들이라는 것을.


 아내와의 깊은 대화는 나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물론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는 사례가 흔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직원이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시도를 이토록 무시하는 조직이라면 충성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과 가족을 위해 회사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단코 아닐 테니까. 그렇게 한 번 마음을 정하고 나니 놀랍게도 내가 몸을 갈아 넣고 있던 이 회사가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회사는 모든 것이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워라밸"


 마음을 정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이직 준비에 바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갈만한 회사가 많았고, 5년간 인사 분야에서 알차게 쌓아 올린 경력은 헤드헌터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의 이직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연봉은 적더라도 워라밸 측면에서 상당한 개선이 있을 것. 둘째, 연로하신 장인장모님을 생각하며 향수병 증세를 앓고 있던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 되도록 처가와 가까운 지역으로 취업할 것.


  워라밸을 대놓고 염두에 둔 이직 준비였기에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한 기업의 적성검사 응시 중 '가정 약속과 회사의 중요한 일이 충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정을 택한다'를 선택했고, 그 때문인지 좋았던 서류 평가에도 불구하고 면접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한마디로 적성검사를 탈락했다;).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이직 준비를 하다 보니 그냥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애초에 저런 질문으로 지원자를 떠보는 회사라면 이직할 이유가 없었기에 오히려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결국 약 1년의 기다림 끝에 놀랍게도 위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직장에 마침 공고가 떴고, 시험과 서류, 면접을 모두 거쳐 경력을 전부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특히 바라던 대로 워라밸만큼은 최고를 달리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남자도 육아휴직을 최대 3년까지 쓸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한다. 확실한 자녀계획을 가지고 육아휴직에 혈안이 되어 이직한 것은 아니지만, 환경이 갖춰지니 자연스레 아이를 원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유사하게 자녀계획과 육아휴직의 가능 여부는 선후를 가릴 수 없으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곳도 엄연한 K-직장이므로 남자의 경우 1년을 초과한 사례가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이직한 만큼 최초의 사례로 발자국을 남겨볼 생각이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을 실천해 나갈 생각에 내 가슴은 오늘도 뛰고 있다!

이전 05화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