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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무솔 Sep 12. 2023

아이를 보아야 아이가 그립다

아빠 자격 취득기

세상 귀찮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생각이란 것은 아주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조금만 조건이 달라져도 변하기 마련이다. 평생을 약속한 사람들이 헤어지는가 하면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청첩장을 보내온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혹은 어린이)에 대한 내 생각도 다르지 않게 수시로 변해왔다. 아이에게 우는 것은 권리이고 시끄러운 것은 자유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들을 적잖이 귀찮게 여겼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떼를 쓰거나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고작 이십 대인 나의 입에서도 ‘요즘 것들은’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또 강하게 훈육하지 않는 부모를 보면 그들의 자격을 엄격히 심사했다. 물론 대부분은 탈락이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 것은 스스로 어른이 되지 못한 탓이었다. 나의 유년은 행복했으나 엄격했고, '오토바이를 타는 자는(if) 10대 이상의 회초리에 처한다(then)'는 식으로 담백 무결했던 집안의 규율은 신상필벌과 권선징악의 교훈을 학습하기에 제격이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귀찮은 것을 제일 싫어했던 나는 자연스레 순종적인 성격으로 자라났다. 거의 유일하게 반항한 것이 피아노 학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한 정도이니 부모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든 법률에 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특수한 상황을 표준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법치주의 민주시민으로 자라난 입장에서 행복만 있고 엄격이 없어 보이는 육아는 책임 없는 방종이며, 사문난적에 불과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보면 이해가 되질 않았고 조금이라도 버릇없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뭉근하게 화가 끓었다. 그러나 아이는 말을 아이 듣기 때문에 아이가 아니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하고 아이를 끊임없이 '이상한 존재'로 여겼기에 결혼 전까지의 나는 육아는커녕 남의 아이를 잠시 견디기도 힘든 고약한 존재였다.


아이는 원래 말을 아이 듣는다(출처: 썬비의 그림일기 https://www.instagram.com/sundayb/)



책임 없는 쾌락(?)에 스며들다


 이런 생각은 결혼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자녀가 생긴 친구들을 만날 때면 그들의 삶은 너무 힘들어 보였고 때로는 불행에 가까워 보였다. 진짜 어떻게 키우나 싶기도 했고, 실제로 힘들다는 한탄을 듣기도 했다. 특히 허물없이 지내온 가까운 친구들이 덜컥 엄마 아빠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고사성어처럼 떠올랐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웃음을 자아내던 학창 시절 친구들이 한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모습은 일견 위태해 보였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조카 사랑은 삼촌이라고 했던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의 아이가 아닌 친구의 직계비속들은 나와 미약하지만 분명히 상관이 있는 존재들이었고, 그들이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말을 못 하면 못해서 귀엽고, 걸으면 걸어서 귀엽고, 조곤조곤 얌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물론 아이를 돌보는 것에는 철저히 서툴렀기에 울거나 화를 내면 으레 부모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머쓱해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라고 말했고, 이내 그들의 손에서 울음을 그치는 아이들을 볼 때, 비로소 코흘리개들이 어른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그런 상황을 즐겼지만 곧바로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귀엽기로 따지면 고양이와 강아지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귀여움만으로 생명을 덥석 키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산과 육아는 아직까지 책임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고, 그것이 주는 행복은 여전히 나와 상관이 없어 보였다. 랜선 이모 삼촌도 있는 마당에 친구들 덕분에 진짜 이모 삼촌이 되었으니 그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닐까? 아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게 가끔의 만남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만남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지방에 내려오고 난 뒤(이전글: 지방에 살어리랐다)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해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는 젊은 부부들이 꽤 있었고, 신기할 정도로 다둥이 부모나 늦둥이 부모가 많았다. 교회 내에서 자녀는 축복이었고 그러한 문화와 신념은 그들의 마음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지방의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려는 목표가 아니라 내 자녀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 낯설면서도 넉넉해 보였다.


 자녀가 있는 가정들과의 교제가 깊어지자 아이들을 접하는 장면도 완전히 바뀌었다. 각종 만남의 자리에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몰려들었고, 이제 나에게 아이들은 그저 가끔 볼 수 있는 귀여운 대상을 넘어 매주 몸으로 놀아줘야 하는 역동적인 무리가 되었다. 술래잡기와 얼음땡, 피구와 물놀이, 레고와 보드게임, 공룡과 로봇과 인형들의 향연에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져 갔다.  옛날 생각에 갇혀 보수적으로 놀아주려는 나에게 아이들은 늘 새로운 놀이방식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 할머니꽃, 무지개꽃, 공룡꽃(…) 등 수많은 배리에이션이 존재했고, 나는 체력이 고갈됨을 느끼면서도 아이들과의 놀이에 흠뻑 빠져 동심으로 회귀했다. 그렇게 나는 임시직이 아닌 정규직 삼촌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있기에 삼촌이 된다(출처: rawpixel)


 이미 조카를 넘어 천사들이 된 아이들을 항상 볼 수 없는 것은 때로 고역이었고, 어느새 아이들이 보고 싶어져 모임을 일부러 만드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다보니 경험이 쌓인 탓일까. 레벨업한 삼촌이 된 나는 이제 아이가 울어도 머쓱해하기보다 달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아이들은 타자가 아닌 나의 세계에 들어온 느슨한 가족이 된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부모는 셋째 자녀가 있음에도 넷째 자녀를 고민하거나, 나이 때문에 새로 임신은 어려우니 진지하게 입양을 고려하는 대단한 부부들이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다 보니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 역시 자연스레 자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것들 버릇없다며 남의 자식을 보면 화부터 내고, 친구들의 육아를 연민하며 귀여움만 쏙 챙겼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임신과 출산이 높은 확률로 부부를 힘들게 하고, 자녀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할 경우 그 역시 불행할 것이라는 걱정 일변도의 패러다임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경제보다 중요한 이유


 이렇게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한 우리의 자녀를 하루빨리 보고 싶어졌고, 이는 어느새 그리움이 되기에 이르렀다. '남의 자식도 저렇게 예쁜데 내 자식은 얼마나 예쁠까!'하는 생각이 나에게도 생긴 것이다. 결국, 우리 부부는 많은 대화와 깊은 생각 끝에 자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고 아들이든 딸이든 바보가 될 준비를 마칠 때쯤 감사하게도 임신에 성공했다. 지방에 내려와 새로운 사람들과 아이들을 만난 특별한 경험이 보편적인 능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계속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면 우리 부부의 생각이 바뀌고 그것이 자녀계획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인크루트 등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의 51% 이상이 '경제적 이유'라고 한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도 경제적 상황 때문에 가질 수 없는 사회는 분명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경제적인 상황을 떠나 아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거나 아이가 부부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적은 것은 아닐까? 나와 아내는 우연한 기회로 아이들이 주는 행복을 충분히 체험하고 자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많은 경우 자녀계획은 관념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임상실험 없는 말 그대로 '계획'은 흔히 많은 오차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수반하게 된다.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는 문제를 경제 이슈와 출산율이라는 지표가 전부 독점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분명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경제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서적인 부분이나 중요한 가치들에 대한 고민이 당연히 유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제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아이들을 많이 보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그 행복을 체험한 부부들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들의 아이를 꿈꿀 수 있는 분위기가 충분히 형성되었으면 한다. 경제적 풍요보다는 인생의 풍요를 이유로 자연스레 아이를 원하는 부모가 많아질 때 우리는 더 웃고, 더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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