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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히 Jul 11. 2022

책을 읽는 일




어릴 적 매해 초등학교 방학 때면 난 학교에서 정해 둔 필독도서를 읽어야만 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자유인처럼 흥청망청 놀기 바쁜 나 같은 아이를 위해 학생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듯 필독 도서를 읽었는지에 대한 증거자료로 독후감 쓰기 숙제 역시 빠지지 않았다. 방학이라면 모름지기 놀아야지 맞지 않겠나. 나중 일은 생각하지 않고 긴 듯 짧은 방학이 끝날 무렵엔 개학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긴 것 같았던 방학은 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미뤄 둔 필독 도서 목록을 보니 앞날이 캄캄했었다. 그때 나에게 독서는 죄책감이 담긴 무거운 것이었다. 하루빨리 A4용지에 가득 찬 독서 목록 과제를 해치우기 위해 허겁지겁 무거운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곤 했다. 하지만 그쯤엔 항상 과제 도서의 10권 중 1권이 있을까 말까 였다. 이런, 한 발 늦은 것이다. 나와 같은 친구들이 많았던지 며칠이 지나도 그 책들은 자리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난 조금의 잔머리를 굴렸다. 정보의 시대에서 인터넷 검색은 게임 속 치트키 같은 것이었다. 


마음은 쓰이지만 방학 숙제는 꼭 해야 한다는 나의 게으른 이상한 책임감 덕분에 과제를 미룬 나 자신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고는 독후감을 검색하며 다짐했다. 다음엔 방학 땐 꼭 미리 책을 읽어둬야지. 이 다짐은 다음 방학이면 새해의 다짐처럼 잊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래도 조금의 양심을 지키려 다른 사람이 쓴 독후감을 그대로 베껴 쓰진 않았다. 독후감 내용을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내 생각과 죄책감을 눌러 담아 적었다. 그런 작업을 몇 년간 하다 보니 나름의 꾀도 생겨 책을 대충 읽고 독후감을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반강제적인 독후감은 독서의 매력을 반감시켰고 독서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필독 도서는 누가 정한 걸까. 그 어린 마음에도 불만이 새어 나왔다. 그냥 독서도 아니고 필독이라니 남들이 다 읽는 것을 나는 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학년이 올라갈수록 독서 과제가 줄어들고 암기 풀이 과제들이 늘어나자 공부를 핑계로 나는 독서를 점점 더 멀리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굳혀갈 때쯤 친구가 내게 물어왔다. "너 소설책 좋아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그 친구는 책을 아주 좋아했는데 소설책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인터넷 소설까지 모두 섭렵한 독서 마니아였다. 종종 친구가 쉬는 시간에 책상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을 보았지만 서로 한 번도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친구가 갑작스레 내게 책을 좋아하냐고 물은 것이다. 고개를 휘저은 내게 눈을 반짝이며 친구는 말했다. "요즘 해리포터라고 시리즈 책이 하나 나왔는데 그거 정말 재밌어! 책을 안 읽는 사람들도 그 책 한번 읽으면 다음 편까지 안 읽을 수 없을걸? 나 아직 반납 전인데 한번 읽어볼래?" 친구의 첫 제안과 진지한 눈빛에 얼떨껄에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받아 들었다. 친구는 왜인지 모르게 뿌듯해 보였다. 받은 책을 책상 아래 서랍에 넣어두고는 반납일까지 미루다가 재미있지 않냐는 친구의 재촉 아닌 물음에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야자시간을 때워볼까 하는 심산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보니 내 예상보다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유치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소설 속 작가의 넓은 세계관에 또 한 번 놀랐다. 한 장만 더 아니 다음 에피소드까지만 읽자 하며 종이를 계속 넘겼다. 한참을 읽다 보니 언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갔는지 마지막 야자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마구 울려댔다. 종소리에 정신을 차려 시계를 쳐다보니 야자시간이 금방 끝났다는 사실에 첫 번째로 기뻤고 왼손에 쌓여 쥐여 든 책의 읽은 장 수가 꽤 묵직하다는 사실에 두 번째로 놀랐다. 친구에게 곧장 달려가 해리포터 정말 대박이라며 감격의 후기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내가 책을 시간도 모르게 빠져 읽을 수 있다니. 나는 다음 편이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인기 도서는 그 명성답게 쉴 틈 없이 손에 손으로 전해져 애타는 내 마음과 달리 멀어져 갔다. 


이렇게 간절히 읽고 싶었던 책이 있던가. 해리포터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은 열광했고 그럴수록 그다음 편은 더 읽기 힘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심을 빨리 먹고 친구와 도서관에 들렀지만 빼곡히 꽂힌 다른 분야의 책들과 달리 해리포터 시리즈는 텅텅 비어 있었다. 매번 그렇게 허탕을 치다 보니 실망도 했지만 사람이 뜸한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책을 찾으러 간 친구를 기다리며 계속 덩그러니 앉아 있다 보니 주변이 보였다. 암묵적인 규칙대로 조용한 이곳에 들리는 소리는 책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그 속의 내 모습이 어색하고 맞지 않은 다른 색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색함에 조용히 일어나 다른 책을 한번 읽어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에 이곳저곳의 책을 빼내어 휘리릭 넘겨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책을 보니 어떤 걸 먼저 읽어야 할지 몰라 선뜻 하나를 빼내 오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니 친구가 내게 말했다. 


"처음엔 소설책을 읽는 게 좋아. 나도 소설책으로 책 읽기 시작했어." 나를 해리포터의 길로 인도해 준 친구의 그 말은 신뢰가 갔다. 나는 당장 친구의 조언에 따라 소설책 분야에 기웃거리다 책을 하나 빼어 들었다. 그 책의 이름은 좀머 씨의 이야기였다. 수채화 삽화가 그려진 책에 나름 얇은 두께의 그 책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너무 오래전이라 책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독특한 이름의 책 제목과 감성적인 삽화, 손에 느껴지는 종이의 감각 그리고 책을 읽던 그 조용했던 순간과 공간을 기억한다. 그곳에 앉아 조용한 아늑함 안에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으로 한 번, 속으로 되뇌며 한 번, 그렇게 천천히 읽다 보니 활자가 더 와닿았다. 나는 그때 처음 도서관이 답답하고 따분하기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소음이 없는 마음이 되뇌는 글 소리만 들리는 곳.


그곳은 그런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그 기억을 시작으로 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책을 읽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 많은 않구나. 이래서 책을 읽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는 친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정해 둔 필독 도서보다 내가 선택한 책을 읽다 보니 죄책감보다 안정감이 들었다.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냈던 뿌듯함도 기억한다. 그래서 난 그 뿌듯함으로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책을 하나 더 집어 왔다. 그런 경험이 쌓이자 책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도 책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었구나 라는 관념이 남게 되었다.




 조용한 고요함 속에서 누군가의 생각을 읽어보는 일은
내 마음에 글이 적히는 시간이다.



마음에 글이 적히면 생각이라는 마음속 독후감이 남게 되고 그 독후감은 내 안에 지혜가 된다.

어떤 일이든 자유로운 선택의 시작이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곤 한다. 누군가 정해둔 필독도서를 읽는 것보다 내 마음이 정한 첫 책에 대한 기억이 더 좋았고 시험기간에 쫓겨 억지로 갔던 삭막한 도서관보다 읽고 싶은 책을 찾기 위해 갔던 도서관의 기억이 좋았다. 규칙과 억압이 없는 자유로움에서부터 시작한 모든 경험이 좋았다. 도서관에서 느꼈던 책들의 향기와 안락한 의자 그리고 고요함이 주는 안정감. 어른이 되어서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 정해둔 규칙에 시간 맞춰 억지로 발맞춰 걸을 필요가 없다는 점과 그저 내가 원하는 규칙과 선택으로 자유로운 나만의 시작점을 얻은 마음의 여유로움이 가장 좋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새롭게 시작한 공부가 어릴 적 했던 공부의 기억보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가 선택했다는 시작점에서 다르지 않나 싶다.




시간과 규칙에 정해지지 않고 하고 싶을 때 다시 무언갈 해보는 일.
어른이 되니 그 자유로움 하나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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