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두 단어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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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와 존재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을까?

by 바질 May 29. 2023

서울, 잠실 롯데시네마에 다녀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결론부터 말하면 엄청 재밌다. 마블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개봉 당일에 챙겨 봤겠지만, 나는 주변인 세 명이 추천한 덕에 겨우 영화 티겟을 예매했다. 킬링타임용 영화에 매력을 못 느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는 마치 만 원짜리 뷔페를 주문했는데 오만 원짜리 다이닝 저녁을 대접받은 듯한 황송한 기분이었다.


※가디언즈오브갤럭시3 스포주의※


브런치 글 이미지 1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의 주인공은 (너구리처럼 생겼으나 너구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로켓이다. 로켓은 생체 실험을 당하던 동물로, 뇌 실험으로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아이큐 덕분에 실험실을 탈출한다. 다만 실험을 총괄한 하이 에볼루셔너리에게 존재 가치를 후려치기 당하던 과거 때문에, 자유를 찾은 뒤에도 만성적인 우울에 시달린다. 영화 초반부는 라디오헤드의 I'm a creep (나는 음침한 놈이야) BGM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로켓이 나온다. 묘하게 찌질하면서도 귀여워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로켓의 과거를 살펴보면 함께 생체 실험을 당하던 동료가 있고 그를 창조한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있다. 뇌를 개조당한 직후 고통스러워하는 로켓을 위로하는 동료는 라일라, 플로어, 티푸스이다. 그들은 좁은 창살 안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먼 훗날 신세계로 이주해 푸른 하늘을 볼 미래를 기대하기도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동물들은 본래 이름이 없다. 다만 실험 결과를 기록하기 위한 89P13 생체 번호를 부여받을 뿐이다. 파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로켓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동료들은 기뻐하며 그를 로켓이라 불러준다. 그로써 로켓은 폐기될 생체 동물이 아닌 로켓이라는 고유한 존재가 된다.


한편 89P13 최초의 넘버를 부여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도록 의식을 불어넣은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어떤 인간인가. '너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 '내가 없으면 너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등의 폭언을 하며 로켓이 정상적인 자기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이 두 집단이 그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89P13은 우리를 탄생시킨 신 혹은 부모가 부르는 이름, 로켓은 살아가며 알게 된 인연들이 불러주는 이름이다. 전자는 나의 고정된 정체성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생체 번호, 북미 너구리 출신 등) 후자는 내 자아를 거울처럼 비춰주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로켓, 가디언즈오브갤럭시 소속 등).


이를 장 폴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입해 본다. 그는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는 의견을 낸다.


실존과 본질. 가령 의자라는 사물이 존재하고 의자의 본질이 '앉기'라 한다면, 설령 우리가 생각하는 의자의 모습과 동떨어진 모습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의자라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앉기'라는 본질이 실존을 앞서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의자와 달리 고정적인 본질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된다.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89P13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의자와 같아, 89P13을 유전자 실험의 결함을 발견하고 해결해 주는 도구이자, 언제든 뇌만 꺼내고 폐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로켓 스스로,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89P13로 결정된 본질을 거부함으로써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다. 로켓이 하나의 존재로서 거듭나는 순간이다.


가디언즈오브갤럭시3 스토리는 로켓이 하이 에볼루셔너리에게 승리하면서 결말을 향해 간다. 이때 로켓은 "놈은 완벽을 원한 게 아니야, 그냥 원래 대로가 싫었던 거지"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긴다. 이 장면이 좋았던 것은, 로켓이 과거의 생체실험과 폭행의 경험을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주입한 서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결론짓는 데 성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회사, 학교, 어떤 집단이든 우리들 존재를 마치 89P13처럼 여기고, 문제 해결 능력 등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는 환상을 지속적으로 심어 놓는다. (혹은 이 제품을 구매하면 나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환상을 심는다) 그래야 본인들이 우리를 사용하기 쉬운 상태가 될 테니까.


그럴수록 로켓처럼 주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야 한다. 영화 속 로켓 캐릭터는 종종 망설이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 중요한 순간에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할 때에는 거침이 없고 시원시원하다. 이는 매 순간 양자택일해야 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을 거울처럼 보여주면서도, 그 선택이라는 행동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고 우리 고유의 존재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가오갤3이 왜 이렇게 좋았나, 서비스 장면들이 많아서 x10배의 오락거리를 즐긴 기분이기에 좋기도 했지만, 로켓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심층적으로 다루며 우리 안에도 그런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에 감명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혹은 소화하기 어려운 경험이 우리의 본질이 고정된 것이며 바뀔 수 없는 것이라 속삭일지라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그 경험들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고유한 특성으로 승화해낼 수 있다고 이해했다. 나는 누구인가. 마지막 연휴이니 조금 더 고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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