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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4. 2021

나의 첫 심리상담




 학교교권보호위원회를 통해 심리상담을 지원받게 되었다. 교감 선생님, 부장 교사, 학부모가 심의위원으로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서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대응의 적절성을 평가받은 후였다. 학부모가 던진 질문에는 당황했는데 위원회가 끝나서야 피해교사를 몰아세우는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제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요, 사랑하는데요, 그렇지만……”이라며 자꾸만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받은 지원이건만 ‘3개월 이내 접수’라는 기한을 맞추기 빠듯했다. 학교는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고 상처받은 교사가 힘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결국 딱 3개월째 되는 날, 녹초가 되어가며 방학을 맞이하기 직전에 교육청 협력 기관 목록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날짜를 잡았다. 버스로 2시간을 가서 상담 1시간을 하고 다시 2시간이 걸려 돌아와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다들 도움 된다니 무언가 잡아볼 수 있을까 싶어 퇴근하고 힘을 내어 찾아갔다.


 상담센터에 처음 방문한 사람은 <상담 신청서>와 함께 <성인 상담을 위한 질문지>를 작성한다. ‘결혼 여부’ 칸이 미혼, 결혼, 비혼, 재혼, 별거, 기타로 다양하게 나뉘어서 신기했다. 한편 직장, 종교, 학력 등의 구체적인 질문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사전에 서밤 님 블로그에 올라온 <심리상담 FAQ>를 보고 가서 다행이었다. ‘상담에서 왜 이런 걸 물어보죠?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내담자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기 불편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와 같은 내용을 떠올렸다.


 질문지를 적은 후엔 잠시 대기했다. 옆에 있는 팸플릿을 무심코 집어 읽었다. 상담 효과로 일곱여 개가 적혀 있는데 그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편안하고 안전한 세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편하고 안전한 세상, 이라는 말을 읊조렸다. 안전이 강조되는 학교에서 교사의 안전은 어디에 있는지 그간 질문할 생각도 못 했다.


 따뜻한 공간에서 차를 마시며 상담 선생님과 대화하고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문제의 흐름이 정리되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많고

→ 그러면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기지 못하고

→ ① 학생과 기 싸움을 하거나

   ② 좋게 타이르고 나선 ‘왜 나만 어르고 달래는 역할이 되어야 하지?’라는 생각에 지쳐버리고

→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좁을까’ 죄책감을 느끼는 흐름이 반복됨.     



 대화는 교권침해 사안이 된 상황 하나만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전반적인 학교생활, 담임 학급 아이들과의 관계, 내가 느끼는 부담감 등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상담 선생님의 동의하에 기억에 남는 대화 조각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상담 선생님: 아이들과 왜 기 싸움을 하나요? 기 싸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나: 기 싸움이란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는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며, 서로가 서로의 인정을 바라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둘 다 자기 생각을 굽힐 마음이 없고 내 생각을 상대가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 싸움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상담 선생님: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교사'란 어떤 모습인가요?     


나: 바른 모습을 보이며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상담 선생님: 본인이 바른 모습을 보이며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 저로서는 최선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최선인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성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느 담임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성향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우리 반 아이가 만약 다른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면 학교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 선생님: 그건 다른 사람과의 비교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자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 외에는 자신의 범위를 벗어난 게 아닐까요? 자신의 범위를 벗어난 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어요.     


나: 그러나 사람마다 ‘최선을 다한다’라는 기준이 다르잖아요. 마치 누군간 8시간 공부하고 최선을 다했다며 집에 가는데 다른 누군가는 12시간 공부하고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여길 수 있는 것처럼요. 저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에게 못 미치는 수준일 수도 있어요. 또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요. 만약 선생님께서 우울한 사람을 10회기 동안 상담했는데 그 사람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계속 우울하다면, 선생님께선 스스로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실 것 같나요?     



상담 선생님: 안 들 것 같아요. 저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에요. 최선을 다하느냐가 중요해요. (너무 단호하게 확신하셔서 놀랐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재 나의 모습’이 불일치할 때 느끼는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해요. 현재 영화 씨는 학생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높은 이상적 모습을 기대하고, 이것이 자꾸 좌절되면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아요. 현재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요.     


나: (나를 평가하는 것 같은 발언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제가 잘하고 있든 아니든 수치심은 슬픔이나 기쁨처럼 감정이잖아요. ‘슬프지 말아야지’, ‘기쁘지 말아야지’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감정이란 그냥 찾아오는 건데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뭘 할 수 있나요?     



상담 선생님: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면 자존감을 높여야겠죠.     


나: 그렇죠, 자존감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자존감을 높여야지’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높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상담 선생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신념체계를 넓히는 거예요. 신념체계를 넓힌다는 건 ‘교사란 또는 나는 ~ 해야 한다(I have to/I should/I must)’에서 끝내지 않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까지 나아가는 거예요. 칭찬을 많이 받는다고 자존감이 높아지지는 않아요. 자신의 신념체계가 넓은 사람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에요. 스스로를 인정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거죠. 영화 씨가 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받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나: 학부모나 학생과 대화할 때 하지 못 하는 말들이 많죠. 저도 사람인데 가끔 ‘나만 왜 자꾸 상처받아야 하지? 왜 상처받는 소리를 듣기만 하고 똑같이 해주지는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 선생님: 들었던 말 중에 어떤 말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나: “선생님, 애 안 키워보셨죠?”라는 말이요. 저희 반 애가 지각이 잦아서 전화를 드렸더니 그런 사소한 일로 연락하는 게 애를 안 키워봐서 그렇다는 거예요.     



상담 선생님: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나: “아버님, 아버님도 이 애가 첫 애시죠?”라고 말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요.     



상담 선생님: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안 했나요?     


나: 말하면 당연히 기분 나빠하실 거고, 제가 기분 나쁜 건 생각지 않고 저를 안 좋게 생각하시겠죠. 부모가 교사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아이에게도 그 감정이 옮겨가서 저와의 관계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고요. 그럼 결국 아이와 저만 힘들어지는 거잖아요.     



상담 선생님: 교육을 생각하셨군요. 아주 훌륭하시네요. 그런 무례한 말 들으면 상처받는 게 당연해요. 그건 정말 무례한 말이 맞아요. 교사는 전문가이자 사람이에요. 전문가니까 유연하게 전문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사람이므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해요.     


나: 그러면 제가 상처받은 건 전문가니까 그냥 묵혀두기만 해야 하나요?     



상담 선생님: 지금 저에게 말한 것처럼 말하면 되죠. 학부모 상담을 할 땐 전문가답게 웃으면서 잘 넘기고, 전화 끊고 나선 주위에 믿을만한 동료 선생님들을 만나세요. 가족도 있고요. 술 한잔을 해도 좋고요. 학교에서는 전문가답게 행동하고, 사적인 관계에서 훌훌 털어버리면 되죠.     


나: 그건 앞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흉보는 게 아닐까요?     



상담 선생님: 안 될 게 뭐 있나요? 없는 자리에선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다들 그렇게 살아요.     





 처음엔 분명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라는 태도로 견제했다. 그런데 대화가 진행되며 상담 선생님께서 무례한 게 맞다고 하시니 진짜로 그 말은 무례한 게 맞고, 상처받는 게 당연하다고 하시니 진짜로 내 상처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뒤에서 하소연해도 괜찮다고 하시니 정말 말한 것만으로도 후련해졌다.


 나에겐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상담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돈을 내고 대화한다는 게 꺼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달랐다. 친구들에게 말할 땐 “(상대의 어떤 행동이) 짜증 나!”라고 말하고 상대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반면 상담은 나의 행동, 나의 감정에 더욱 집중한다. 친구의 말엔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어도 굳이 반박하지 않지만 상담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반박할 수 있었다.


 즉 평소엔 내가 좋아하는 나의 면모만 나라고 우기고 싶었다면, 상담실에선 내가 싫어하는 나의 면모까지 나라고 내보일 수 있었다. 이곳에선 나를 숨기지 않아도 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내 속마음을 말해도 안전하다는 것, 상담 선생님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본 경험이 있으시다는 것, 이곳에서 한 이야기는 비밀이 보장된다는 것과 같은 ‘전문가에게 돈을 지불한 약속’이 든든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껄끄러워 덧붙여 질문했을 때였다.     





나: 성인 상담이야 자신이 힘든 걸 이렇게 줄줄 말하지만, 아동 상담자의 경우 다르지 않나요? 자의로 상담 온 게 아닐 경우 말을 하지 않는 아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아이가 몇 개월의 상담 내내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나요?     


상담 선생님: 그런 걸 선택적 함묵증이라고 해요. 상담사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관련 증세를 이해하고 상담에 들어가며, 그 아이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겠다고 선택한 거라는 걸 알아요. 그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나 때문이 아니에요. 그 아이의 배경과 역사가 말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게 한 거예요. 이때 상담 목표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를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말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배경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거의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상담실을 나섰다. A4를 반으로 접어 한쪽엔 ‘마음에 드는 나’, 다른 한쪽엔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적어오는 걸 숙제로 받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전문가’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했다.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성직, 노동직, 전문직관이 있다. 사회는 나에게 사명감을 지닌 성직관을 바랐다. 그런데 수업 이외에도 교사가 해야 하는 일은 너무 많았다. 학생 상담, 보호자의 상담, 아침에는 등교지도, 점심에는 급식지도, 우리 반 학생이 징계라도 받게 되면 교내봉사 지도도 해야 한다. 행정업무는 아직 더하지도 않았다.


 나는 초과근무도 달지 못하는 현실에 개탄하는 노동직관과 아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지닌 성직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자신을 ‘전문직’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건강한 교사가 건강한 교실을 만든다.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교사가 효과적인 교실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학생들을 위한 상담실인 위클래스가 있는 것처럼 교사를 위한 상담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교사의 감정을 인정해주는 장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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