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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4. 2021

어른이라고 계속 참기만 해야 하나요?



 첫 번째 상담은 7월 16일에 마쳤다. 며칠 후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예약도 잊고 살았다. 방학하니까 상담받을 일이 없었다. 여지없이 개학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두렵다’라는 단어가 명확히 맴돌았다. 내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가 터질까 봐, 아수라장이 될까 봐, 무엇보다 내가 쩔쩔매게 될까 봐 두려웠다.     


 두 번째 상담은 개학 다음 날인 8월 17일이었다.      


 첫 번째 상담과는 달랐다.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상대를 높이지도 않고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다. 딱 자신만큼의 키로 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담 선생님께서 “영화 씨가 이러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저러저러하기 때문이에요.”라고 설명하시면 나는 “아니요, 잘못 보셨어요. 저는 그래서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에요.”라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두 번째 상담을 끝낸 후 내가 내린 상담에 대한 정의는 ‘불편한 대화’였다.      


 상담이라고 하면 주로 내담자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상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간간이 기분을 묻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상담 선생님은 배려 넘치는 친구라면 하지 않을 말들을 자꾸 던졌다. 직설적이고, 나를 정의 내리며,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셨다. 이에 대해 나 또한 직설적으로, 정의를 반박하고, 해결책의 허점을 짚었다. 느슨해지는 시간이라기보단 긴장감이 팽배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이러한 상담 방식이 잘 맞았다. (아마 선생님께선 완곡어법이 필요한 내담자에겐 완곡하게, 직설어법이 필요한 내담자에겐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리라 생각한다.) 사회화된 어른으로서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을 검열 없이 말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가슴 속 묵직한 돌덩이를 후련하게 깨부수는 창구가 되었다.     


 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런 언행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학생이 있다고 말했다. 학생이라서 교사를 존경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을 존중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감정적인 말들을 내게 내뱉는다고 말했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감정적 대응을 하게 되는데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고, 도대체 성숙한 대응이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상담 선생님께선 말씀하셨다.          





 “성격은 ‘기질적 특성’과 ‘관계 경험’으로 구성돼요. ‘기질적 특성’이 타고난 것이라면 ‘관계 경험’은 관계 상황에서 반응을 통해 가지게 된 성격이죠. 예를 들어 규칙을 잘 지켰을 때 보상 경험이 많다면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이 형성될 거예요.      


 어떤 한 성격을 좋다 나쁘다 규정지을 수 없어요. 모든 성격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어요.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일 경우 플러스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다는 거겠죠. 마이너스는 내가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을 곧장 판단하며 너그럽지 못하다는 거예요. 관용성이 낮다고도 하죠.     


 똑같은 규칙임에도 내가 가진 관용성에 따라 불편함이 달라져요. 내가 관용성이 낮으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불편함이 크고, 이에 따라 감정 반응을 할 가능성도 크겠죠.


 자,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상대의 무기만 보지 말고 먼저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 있을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 학생이 조용히 하는 것이라면 그걸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아, 내가 관용성이 낮아서 이 지점에서 화가 나는구나.’라고 인식하고 ‘조용히 해주면 고맙겠어’라고 감정을 조절하여 말할 수 있겠죠. 그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거예요.”



 나는 답답해졌다.     



 “그러면 결국 저는 제가 화나는 걸 표현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어른이라고 계속 참기만 해야 하나요?”    



 선생님께서는 차분하게 답하셨다.     

 


“표현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표현 방식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속상하다’처럼요. 알면 덜 상처받는다고 하잖아요. 내가 취약한 지점을 미리 알아두면 화가 치솟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요.     


 자, 여기 A4용지에 ‘마음에 드는 나’와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적으셨죠? 경험적 인식 안에는 ‘알아차린 나’와 ‘알아차리지 않은 나’가 있어요. 여기 적힌 건 ‘알아차린 나’예요. ‘마음에 들지 않는 나’조차 맞닥뜨릴 때 이미 알고 있던 자신의 모습인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상황에서 불안하거나 우울한 감정이 들면 ‘내가 모르는 나’를 경험하는 중인 거죠. 그때 ‘나는 왜 이러지?’가 아니라 ‘아, 내가 몰랐던 나는 이런 모습이구나’라고 인식하는 게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이에요.”





 즉 상대에게 화를 내면 오히려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고, 화를 내기 전에 ‘화가 난다’라는 것을 인식하면 조금 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며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격 수련을 하라는 건가? 나는 좀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상담 선생님은 숙제로 해갔던 나의 ‘마음에 드는 나’와 ‘마음에 들지 않는 나’ 목록을 찬찬히 훑어보셨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종합하셨다.          





 “전체적으로 하나로 귀결되네요. 사회적 민감성이 높으신 것 같아요. 모든 성격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다고 했죠?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의 플러스는 관계를 잘 보살피고, 예의 바르고, 일을 똑 부러지게 한다는 거예요. 마이너스는 타인이 평가하는 시선에 민감하고 감정적인 상처를 잘 받는다는 거죠.”





 여기까지 들었을 땐 뻔한 얘기를 하신다는 듯 불만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자기 검열이 강하다는 건 애초에 알던 사실이었다. 내가 놀란 건 이 다음부터다.





 “사회적 민감성이란 반응에 반응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누가 날 때렸다고 할게요. 누가 날 때렸다는 사실에 화부터 날 수도 있고 ‘누가 날 때렸어?!’라고 때린 상대를 찾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때린 사람의 표정을 먼저 확인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울면서 때렸는지 웃으면서 때렸는지 무표정하게 때렸는지를 먼저 본 다음 나의 반응을 결정하는 거죠.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보통 순진성이 높아요. 순진성이란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이렇게 해줄 거야’라는 믿음이에요. 그 예측에서 벗어나면 당황해버리고 분노하기도 해요.” 





 그게 나였다.


 결국 나는 학생이 수업을 방해한 것 자체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준비한 수업에 예상대로 반응하지 않는 게 화가 났던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싶던 선생님의 말씀을 인정하게 되었다. 교사라서 참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나 스스로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에 취약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다.      





 상담 시간에 했던 대화들을 자주 곱씹는다. 가까운 친구들에겐 써먹기도 했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 때는 종이 한 장씩 앞에 두고 ‘마음에 드는 나’와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적은 후 돌아가면서 하나씩 말해보기도 했다. ‘때린 사람 비유’를 들은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나는 누가 날 때리면 ‘안 아픈 척하는 사람’인 것 같아.”          



 이러한 대화들이 두고두고 힘이 되었다. 상담 몇 번으로 나의 인생이 획기적으로 편안해지지는 않겠지만 그 파장이 잔잔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 끝에선 적어도 ‘아, 뭐야. 엄청 큰일인 줄 알았는데 그냥 이런 거였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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