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후기를 블로그에 공유하자 생각보다 많은 분이 공감해주셔서 놀랐다. 그중 오랜 이웃 한 분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나의 경험과 너무나 비슷했다.
“총 10회기였는데 3회기까지는 내담자의 입장에서 상담사와 계속 기 싸움을 했어요. 친절했지만 경계했고요. 상담사가 상담 과정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면 ‘그 답이 꼭 정답은 아니에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5회기를 넘어가니 그 상담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새로운 방향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아요.”
나 또한 함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나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나 자신이며, 당신이 아무리 상담 선생님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식의 마음가짐이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듯했지만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다 3회기 끝자락 즈음, 결국 마음을 열어버렸다.
세 번째 상담은 조금 더 삐걱거렸다. 내 이야기를 풀고,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공감하면서도 해석을 내리시는데 나는 그게 마뜩잖았다. 대화는 안 맞는 나사처럼 헛돌았다. ‘아니요’, ‘전 아닌데요’, ‘그런 게 아니라요’로 시작하는 문장이 반복되었다.
상담 선생님께선 내가 ‘교사라면 당연히~’, ‘학생이라면 마땅히~’ 또는 ‘인간이라면 모름지기~’와 같은 신념이 확고하다고 하셨다. 나에겐 너무 상식인 것들이어서 물러설 수 없었다. 교사라면 당연히 학생을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학생이라면 마땅히 배움의 기회를 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다른 인간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살아라’라고 회피하지도 않았다. 상담 선생님께선 가만히 듣고 맞장구치는 역할만 맡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셨다.
“해석의 틀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신념에서 나오고, 이러한 가치관 또는 신념은 경험으로부터 나와요. 예를 들어 ‘학생이라면 이래야지’, ‘교사라면 이래야지’와 같은 것들이요.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힘이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해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반응이 나오면 감정적으로 응대하게 되고, 감정적 응대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죠.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은 ‘너와 내가 생각이 맞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라고 여지를 두는 거예요. 전체가 다 맞을 순 없죠. 상대를 나에게 맞추려고 하기보단 너와 내가 맞는 일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다른 부분은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 또한 상담 선생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그런데요, 저는 혼자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넘어가는 건 오히려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안 맞는 부분에 관해 대화하고 토론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낼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화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화가 필요한 건 맞아요. 다만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조절하여 전달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단호하고 엄격한 신념을 가진 사람일수록 세게 말하고 감정 반응이 나와요. 감정은 전이가 되거든요. 내가 감정 반응을 하면 상대도 감정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만약 ‘그럴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요. ‘상대와 나의 경험은 달라.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을 뿐,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람마다 생각 패턴이 있어요. 내가 늘 같은 방향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해요.”
나는 알 것 같다가도 반발심이 들었고, 반발심이 들다가도 수긍했고, 수긍하다가도 뾰로통해졌다. 결국 나의 단호한 신념에 관한 이야기는 성공 경험과 성공 경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실패 경험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선생님이 실패에 대해 언급하며 자꾸 학생과 실랑이를 하던 그날의 경험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우리는 웃으며 대화하고 있지만 가느다란 실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희망을 품고 좋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건 맞지만 그 결과에 대해선 단언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나는 상담 선생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마치 ‘성인군자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처럼 들리는 말들에 조금쯤 짜증스레 답했다.
“그런데 제가 말한 성공 경험은 ‘진짜 성공’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저는 딱히 실패를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라도 결국 내가 그것을 통해서 배울 수 있고, 더 나아질 수 있고, 다시 도전해볼 수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인지적으론 그렇죠.”
“네?”
“인지적으론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요. 그러나 정서적으론 실패는 실패라고 느껴요. 아무리 실패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더라도, 아픈 건 아픈 거고 힘든 건 힘든 거예요.”
말문이 막혔다. 그때까지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서 있다가 주저앉아버린 기분이었다.
맞아, 나 실은 힘들어.
나 아직도 정말 힘들어.
교훈이고 배움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나 힘들어.
팽팽하던 실을 놓았다. 그러자 상대가 보였다. 상담 선생님과 내가 팽팽한 실의 양극단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의 저편에 있는 상대는 선생님이 아니라 ‘또 다른 나’였다. 내가 인정하지 않던 여리고 상처에 취약한 나 자신이었다.
그제야 웅크린 나를 안고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처음엔 메모조차 조심스러워 “메모해도 되나요?”라고 질문했다. 선생님께선 “녹음해도 좋아요.”라고 말씀하셨지만 민망해서 슬쩍 끄적이기만 했다. 집에 가는 길엔 상담 내용을 복기하며 정리했다. 그제야 이해되는 말들이 많았다.
3회 차 상담부터는 “녹음해도 괜찮을까요?”라고 여쭤봤고 핸드폰으로 녹음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이어폰을 끼고 그날의 상담을 다시 들었다. 들려오는 나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잔뜩 힘이 들어차 있는 게 우습기도 했다.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하나의 정답은 없어요. 상황과 대상에 맞게 다른 행동을 해야겠죠.”라고 답하셨다.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나는 자꾸 하나의 정답만 찾고 있었다.
마음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쑥 빠져버린 것처럼 허전하고도 시원했다. 마음의 공간이 넓어진 기분이다. 끊임없이 마음에 쌓이는 것들을 앞으로도 차곡차곡 정리하고 청소하고 버려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