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붙잡혔다가 여친에게 싹싹 빈 남자.
보좌하는 의원에게 신념에 대한 질문을 했다가 비웃음 당한 남자.
첫 출마를 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웅얼거리는 연설로 청중들에게 무시당한 남자.
차기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당원들에게 꼴찌를 기록한 남자.
<바이스>는 조지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의 이야기다. 동시에 워터게이트부터 트럼프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현대사를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닉슨 정권에서 럼스펠드와 만나 백악관에 들어가고, 포드 정권과 레이건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딸의 동성애로 인해 일단 정계 은퇴했다가, 조지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되고 부시 정권의 실세로 군림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잘 몰랐던 체니라는 인물의 실상을 깊이 있게, 그리고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영화다.
체니 부부를 연기한 크리스천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는 명불허전이지만, 영화의 옥의 티는 조지 부시(샘 록웰 분)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부시를 연기한 샘 록웰이 <쓰리 빌보드>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음을 상기하면 배우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감독이 생각하는 조지 부시의 캐릭터다. 영화는 조지 부시를 대통령으로서 아무런 자질도 가지지 못 한 채 부통령 딕 체니의 꼭두각시가 된 얼간이로 그리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조지 부시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했던 시절의 희화화된 캐릭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스>는 딕 체니라는 인물의 내면의 갈등을 깊이 있게 그리고 있는 반면, 조지 부시가 등장하는 부분은 삼류 개그 프로그램의 패러디처럼 느껴진다.
미국 진보파가 공화당 대통령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 역사는 오래됐다.
"3류 배우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지 부시 같은 멍청이가 대통령이 될 리가 있겠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설마."
이러한 미국 진보파의 오만은 세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 그리고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이쯤 되면 미국의 진보파는 슬슬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공화당 대선 후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는 않을지도 몰라."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편 대선 후보의 지성을 희화화하는 게 훌륭한 전략은 아닐지도 몰라."
만약 대통령 선거가 누가 더 똑똑한가를 겨루는 싸움이었다면 조지 부시가 아닌 앨 고어가, 도널드 트럼프가 아닌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는 누가 더 많은 선거인단을 모으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조지 부시를 바보로 그리며 희화화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면 미국의 진보파에겐 가망이 없을 것이다. 올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현직 대통령으로 보여준 온갖 추태에도 불구하고 재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물론 <바이스>는 훌륭한 풍자 영화이자 정치 영화다. 민주당 지지자나 진보주의자라면 영화를 보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진보파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조지 부시에게도 당연히 내면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체니만큼 부시 역시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면 훨씬 훌륭한 영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라크 전쟁, IS 테러, 산불, 주택 버블, 마약 중독으로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의 사진들이 삽입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딕 체니라는 개인이 만들어낸 문제들일까? 조지 부시가 됐든, 도널드 트럼프가 됐든, 딕 체니가 됐든, 버락 오바마가 됐든, 어떤 개인을 절대악으로 몰아가는 것은 쉽다. 하지만 쉽고 단순한 대답일수록 복잡한 현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은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