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어느 선수가 함께 경기에 출전한 동료 선수를 비웃는 듯한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되었다. 해당 선수는 이후에 있었던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TV 앞에서 큰절을 하며 '대국민 사과(?)'를 했고, 몇 달에 걸쳐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등 유명인은 단순히 '유명세'를 넘어서 대중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태도 논란, 인성 논란, 왕따 논란, 욕설 논란, 일베 논란, 여혐 논란 등등 유난히도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는 논란이 많게 느껴진다. 각종 논란의 현장에서 연예인들에게 악성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이 주관적으로는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 기분이 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논란이 일단 사실이긴 한가 하는 의문이 들 뿐더러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개인에 대해 도를 넘어선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키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인터넷의 발달이 그런 경향을 가속시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인 90년대에는 TV라는 매체가 그 역할을 했다. 대중의 욕망을 먹고사는 TV는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몰락시켜 둘도 없는 악당으로 만들기도 한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의 <아이, 토냐>는 TV라는 매체의 속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 토냐>는 트리플 액셀을 성공하며 피겨스케이팅 스타로 떠올랐던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복하지 않은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토냐는 피겨스케이팅계에서도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엄마에게 칼을 맞고, 남자친구에게 총을 맞을 정도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그럼에도 꿋꿋하게 노력을 계속하여 동계올림픽 출전의 기회를 얻게 된다. 1994년,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던 도중 토냐의 라이벌인 낸시 케리건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낸시의 습격을 사주한 것은 토냐의 남자친구였음이 밝혀지며 토냐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영화에서는 남자친구가 벌인 일을 토냐가 사전에 몰랐던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실제 사건의 사실관계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어디까지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다.)
얼핏 보면 스포츠의 세계에서 벌어진 하나의 스캔들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토냐 하딩 사건을 통해 미국사회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토냐에 대한 언론 매체의 취재는 점점 과열 양상을 띠게 된다. 집에서 나오지 않는 토냐를 끌어내기 위해 방송국이 멋대로 그녀의 차를 견인하기까지 한다. 올림픽이 끝나고 사건이 일단락되자 사람들은 또 다른 오락거리를 찾아 나선다. 집 앞을 메웠던 취재 차량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 TV에는 미국사회를 다시 한번 발칵 뒤집어놓은 O.J. 심슨 사건이 보도되는 영화 속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대중도, 언론도, 씹고 버릴 만한 소재가 필요했을 뿐, 토냐의 이야기도 낸시의 이야기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최근 한국의 TV가 "조국조국조국조국"에서 "코로나코로나코로나코로나"로 옮겨갔듯이 말이다.
영화에서는 토냐의 입을 빌어 "미국은 사랑할 대상, 그리고 미워할 대상을 원한다(America, they want someone to love, someone to hate.)"라고 말한다. 피겨스케이팅계의 스타에서 국민왕따로 전락한 토냐의 이야기는 TV 매체에 대해 우리가 품는 욕망을 반성하게 만든다.
여기서 이야기를 90년대 미국의 TV가 낳은 또 한 명의 문제아로 이어가 보자. "트럼프 시대의 할리우드 읽기"라는 매거진의 주제에 맞춰 등장할 인물은 트럼프였다. 트럼프가 대선에 등장할 무렵 들었던 의문은 도대체 이 인간은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답은 출생지인 뉴욕도 아니고, 출신학교인 와튼 스쿨도 아니고, 그가 사업을 한 부동산 업계도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 바로 TV에서 튀어나온 인물이었다. 미국 방송을 본 적이 없어 몰랐지만, 트럼프라는 인물을 누구나가 아는 셀럽으로 만든 것은 2000년대 TV 예능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You're fired"라는 유행어였다.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 뛰어들었을 때, TV를 비롯한 주류 언론은 트럼프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도 TV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는가라는 측면에서 트럼프를 능가할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태도로 어떤 말을 해야 TV에서 다뤄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자신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혐오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TV의 욕망, 그 뒤에 있는 대중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철저히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가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슬로건을 빌려 온 레이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이건이 영화의 시대에 스크린이 낳은 대통령이었다면, 트럼프는 TV의 시대에 브라운관이 낳은 대통령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되풀이된다. 로널드 레이건이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대통령을 연기한 명배우였다면,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를 웃음거리로 만든 예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