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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Oct 23. 2022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망령

도덕과 정치의 분리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 중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千下)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유교 경전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격물치지 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팔조목 중 후반부다. 개인의 지식, 도덕성, 가정, 국가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유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말이다. 유교는 성인군자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인이 도덕성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정치인을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서 유교 경전의 지식이 합격 기준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는 타당하다. 문제는 유교적 세계관과 단절된 현대 한국에서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종종 들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인의 불륜이나 정치인 가족의 스캔들 등이 뉴스가 되면, 수신제가(도덕)도 못하는 사람이 치국평천하(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비판이 일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이 수용하고 있는 서양식 정치체제에서는 정치인이 성인군자일 필요가 없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했는데, 이후 근대 정치에서는 도덕과 정치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치인에게 과도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사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전문성 검증보다는 도덕성 검증이 더 주목받는다. 전문성에 대한 논쟁은 대중의 관심을 부르기 어렵고, 언론에서도 잘 다뤄주지 않는 반면, 도덕성 논란은 대중도 알기 쉽고 언론도 다루기 좋아한다. 당연히 야당도 전문성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하기보다는 다소 지엽적인 도덕성을 주된 공격 포인트로 잡는다. 실제 정치적 현안과는 무관한 후보자 개인에 대한 공격의 장이 된 인사청문회를 보다 보면 불모스럽기 짝이 없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은 2014년 지방선거 당시의 서울시 교육감 선거였다. 처음에는 고승덕 후보가 우위가 점쳐졌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조희연 후보가 당선되었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고승덕의 딸이 인터넷에 폭로한 글이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딸의 폭로 글에서 고승덕의 교육감 자질 부족을 확인할 수 있다고는 하기 어렵다. 폭로 글에서 드러난 팩트만 보자면, 이혼의 원인이 고승덕에게 있고, 이혼한 뒤 자녀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전부다. 딸이 보기에는 당연히 원망스러웠겠지만, 가정 내에서의 사적인 문제다. 선거라는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승덕은 선거 유세 중에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하며 사과했다. 결과적으로 고승덕이 낙선한 데는 딸의 폭로가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물론 정치인이 아니라 교육감 선거였다는 사실은 고려해야겠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이데올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는 필자가 고승덕을 지지한다거나 조희현 단선을 비판하기 때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자 시절의 조희연 책을 몇 권 읽은 바 있고, 그의 교육감 당선 자체에는 불만이 없다. 그러나 누가 이기고 졌냐와는 별개로 공적 중요성이 없는 후보 개인의 가정사가 선거 결과를 좌우하게 된 것은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 국가에서 정치인이 성인군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잔재에서 벗어나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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