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속 엄마는 덤덤한 목소리로 한껏 소심쟁이가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봄이면 잔뜩 웅크렸던 몸을 기지개를 켜고, 여름이면 왕성하게 왕성한 성장을 하고, 가을에는 예쁘게 물이 들어 엄마를 기쁘게 해 줬던 다육이들이 올 겨울에 절반이 똑! 하고 죽었다고 했다. 새로 시작한 밭농사에 바빴던 엄마는 베란다 한가득했던 다육이를 돌볼 새가 없었다며 속상함일지 미안함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베란다 한가득 메웠던 다육이들
엄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내는 강한 사람이지만, 길가에 핀 꽃에도 마음이 설레 봄이면 꽃처럼 차려입고 꽃놀이는 가는 천상 소녀이시다. 그런 소녀에게 위로가 되어주던 다육이들의 비보라니, 얼마나 상심이 컸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엄마는 빈 화분을 깨끗이 정리해서 당근에 헐값에 놓았더니 순식간에 팔렸다며 좋아하면서도 섭섭해했다. 당근으로 팔려간 그 화분들은 그냥 모은 화분들이 아니었다. 햇볕이 좋은 그런 날에 하나둘씩 사모으던 화분인데 팔아야 했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냔 말이다. 꼭 좋은 사람에게 가서 이쁜 식물 담고 사랑받길 바란다고 하셨다.
주인을 잃은 빈 화분들
그나저나, 농부는 어떤 이유로 죽였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엄마는 다육이 농사를 망쳤을까? 어렵다는 농사도 척척 해내는 부모님의 베란다에서 식물이 죽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너무나도 놀라서 어째서 그리되었냐고 물었다.
“아니, 글쎄~, 깨를 좀 말린다고 선풍기 바람을 주야장천 틀어놔뜨니~ 다육이들이 비비 꼬고 다 말라비틀어져 버렸잖어~”
바람이 원인이라니. 겨울의 추위로 냉해를 입었던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했던 내 예상은 정답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틀렸다. 아예 예측할 수도 없던 황당한 이유였다. 선풍기 바람 때문에 그 많던 다육이가 전사를 했다. 엄마는 바람이 독이 될 것을 알면서도 수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기에 ‘버틸 놈은 버텨라!'하고 건조를 위한 선풍기 바람을 강행했던 것 같다.
식물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식물은 바람을 좋아하지 않나요?”
반은 맞고 반은 애매하다고 답해주고 싶다. 식물은 솔솔 부는 바람은 좋아하지만 세차게 때리듯이 부는 바람 앞에서는 나약하다. 또 식물마다 좋아하는 풍속과 풍량이 다양하다. 그뿐이랴?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도 좋아하는 바람이 다르다. 어쩜 갈대 같은 내 마음과 같은지. 저번 달에는 그 무엇보다도 맛있던 마라탕이 이제는 조금 질리고, 구수한 순대국밥을 먹어줘야 그날 하루의 스트레스가 풀린다. 날씨 변화에 대한 몸의 상태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나와 식물의 차이점이라면 난 싫은 게 참을 만하지만, 식물은 시들시들하다 생을 마감한다는 것?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는 식물들.. 조금만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우리 정여사는 식물을 왜 키우시나?"
엄마가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냥 키우는 거지'라고 시큰둥하게 답할 줄 알았는데,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이 반짝이는 표정으로 정 여사가 대답했다. 그냥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부부간에 속상할 때나 자식이 서운하게 할 때처럼 혼자서 마음 아픈 일들이 있을 때, 베란다로 나가 가만히 꽃들(다육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러면 다육이들이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항상 그 자리에 묵묵히 자라나 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의 파도가 잠잠해진다고.
"화가 났을 때, 씩씩거리고 꽃밭에 나가면 사라지지"
시든 잎을 치워주다 보면 남편의 굳은살 가득한 손도 생각나고, 흙에 영양제 뿌려주다 보면 무릎 시리다던 남편의 말도 생각나고, 또 어느샌가 자라고 있는 새순을 보면 우리 아기들 생각도 난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괴롭던 감정들이 사그라든다고. 내 지분은 얼마나 되는 걸까 하고 조금 멋쩍었지만, 엄마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엄마의 소중한 꽃밭
죽이는 것을 두려워해서 식물을 키우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생명을 죽이는 데에 이상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어떠한 불편함을 느끼는지 잘 안다. 생명이 다한 화분을 치울 때면, 한 생명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나 물 주기 같은 아주 사소한 할 일을 제때 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식물을 돌보는 것이 취미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내게 이야기하곤 한다.
"저는 식물을 다 죽여요. 그래서 안 키우려고요. 관리를 잘 못하더라고요."
식물을 식집사로써, 식물을 죽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의 생각이 궁금했다. 엄마는 곧장 이렇게 말했다. 식물은 기쁨과 위로를 주고 항상 경험을 남기고 간다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가 받는 게 더 많다고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나는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어느 날은 새순이 곱게 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또 어느 날은, 강한 생명력으로 나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목이 말라 시들시들하다가도 물만 주었을 뿐인데, 반나절 만에 금세 생기를 되찾는 모습은 어찌나 이쁜지 모른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도 한 번 더!'라며 힘내보자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작은 생명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다.
"식물은 여러 이유로 내 곁을 떠나가. 내가 못 해줬거나, 너무 오래 살아서 뿌리 힘이 약해졌거나, 정말 많은 갖가지 이유로."
물론 식물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한 아쉬움을 안겨주겠지만, 그 경험은 좋은 밑거름이 되어 더 나은 식집사가 되게 해 줄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식물을 키워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성장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대만 그런 것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상심한 엄마께 마음과 보낸 왕수선화
인간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일어난 일이다. 사람이 되었건, 물건이 되었건, 모든 것은 내 옆에 왔다가도 언젠가 떠나간다.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과 인연들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흘러가게 두어야 했던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무의미하진 않았다. 모두가 나에게 유의미하고 소중한 경험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식물에 대한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식물이 말라죽을까 무서웠을 때는 과습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과습이 무서워서 화분을 말라버리게 했을 때는 식물의 잎이 여리게 느껴지면 물을 줘야 하는 때란 걸 알게 해 줬다. 많은 실수들로 조금씩 중용을 배워가고 있다. 오늘도 명심하는 적당히!
✓ 별 것 아니지만 알면 좋은 지식 몇 줄
통풍이 중요하다고 모든 바람이 좋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 바람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만, 태풍보단 무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