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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모단 Mar 06. 2024

내 어린 날의 푸릇한 기억

아버지가 가꾼 작은 '가든'



'가든맨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아파트의 이름이었다. 어릴 적 살던 작은 아파트는 식물로 가득 찬 작은 천국이었다. '가든맨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집 풍경이었다. 그곳을 가꾸던 아버지는 마치 조용한 정원사처럼 느껴졌는데, 아버지는 항상 쉬는 날이면 볕 좋은 베란다에 앉아 한참이나 난을 돌보곤 하셨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아침에 일어나 만화영화를 보거나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거나 아버지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식물을 들여다봤다. 함께 놀아달라고 보채지는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 뒷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여서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왁!’ 하고 놀라게 하고 싶었지만, 나의 영웅을 위한 시간만큼은 고요하게 기다려주었다.



  아버지는 식물을 가지고 뿌리를 뽑기도 하고 약을 주기도 하고 가위로 이리저리 잘라주었는데, 어떤 날은 금방 끝나기도 했고, 어떤 날은 새벽부터 시작해서 해가 질 무렵에야 끝이 나기도 했다. 어린 나는 식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어찌 되어가는지 잘 몰랐지만, 모든 과정이 끝났다는 것은 알기 쉬웠다. 그것은 물을 주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흙으로 더러워진 손을 탁탁 털며 베란다 한편에 세워둔 샤워기 호스를 꺼내 ‘공주야~ 물 틀어줘~’라며 부탁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꼭 나를 불러 수도꼭지를 잡게 하셨다. 내가 물을 틀면 꼬록꼬록하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참 재미있었다. 모든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찰박찰박하며 물장난을 소소하게 즐겼다. 내 옷이 너무 더러워지면 어머니가 항상 싫어했으므로, 아주 적당히 즐겼다.








  어느샌가 우리 아버지 ‘남 씨’는 동네에서 죽은 난초도 살리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그 덕에 여기저기서 “남 씨가 키워봐요.” 하며 화분을 얻어 왔다.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잎이 시들다 못해 파삭 말라버린 것은 기본이고, 어떤 것은 뿌리 일부만 겨우 살아있는 적도 있었다. 한때는 비싼 값에 사 온 녀석들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니 그 모습이 안타까워 차라리 내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다.



“아이고, 이거 살겠나…”



  우리 집에 온 화분을 보며 자신 없어하시면서도 흙을 털어내고, 썩은 뿌리는 잘라내고 깨끗한 새 흙으로 채워 분갈이를 해주셨다. 매일매일 들여다보며 어떤 날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물을 흠뻑 주시면서 제 힘을 찾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셨다. 그러면 어김없이 다음 해엔 튼튼한 잎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찌나 정성으로 키우셨는지. 잘 가꿔진 베란다는 푸름이 가득해서, 그 속에서 나도 푸르른 기억을 안고 유년기를 보냈다. 주황색의 멋진 꽃을 피우는 군자란은 매년이면 꽃을 가득 피웠다. 향기롭지는 않아도, 꽃이 만개한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해 줬다.




활짝힌 꽃이 예뻤던 군자란




  식물만 살피는 모습이 조금 얄미웠지만, 아버지가 가꾼 작은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얼마나 이뻤냐면, 하루는 엄마가 딸내미를 데리고 사진을 찍어줬다. 집에서 베란다가 이쁘다고 말이다.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 내리쬐던 봄날이었는데, 어김없이 군자란 꽃도 활짝 피고, 다른 꽃들도 폈었다. 엄마는 베란다로 나가 화분을 달그락달그락 옮기셨다. 그리고선 곱게 자리한 화분들 사이로 가장 예쁜 공주를 두고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곱게 옷을 입혀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카메라 뒤에 엄마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강한 책임감 덕분에 유복하진 않았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아왔다. 아버지는 누구나 쉽게 하는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전 재산을 사기로 잃었을 때도 잠 오지 않는 새벽이면 홀로 책을 읽으셨다. 그 긴 밤을 아무도 깨우지 않고 혼자 지새우셨다. 그리곤 출근을 하셨고, 돌아와선 식물들을 살피셨다. 큰 변화는 없었다. 매일 가는 3교대 근무, 매일 함께하는 저녁 식사, 매주 함께 가는 도서관. 사소한 변화라면, 아버지는 웃음이 조금 많이 사라졌고, 혼자인 시간이 늘어나셨다.


  어쩌면 식물이 준 어떠한 책무감이 아버지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우리 가족을 지탱해 주셨다. 최근에 회사에서 정년퇴직 행사를 해줬다며, 나에게 감사패를 들고 활짝 웃고 계신 사진을 보내오셨다. 정년을 축하드리고, 인생의 2막을 응원한다며 케이크로 내 마음을 담아 보내드렸다. 정년을 꽉 채운 퇴사라니. 이제야 아버지가 걸어온 삶의 무게감이 조금 실감 난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은 결혼식을 앞두고 싱숭생숭한 마음 때문이렷다. 철든 딸내미는 마음이 심란하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둔 시점부터는 눈만 마주쳐도 아련해지는 부모님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결혼식장에서 거칠어진 손을 맞잡고 걸어갈 날을 보름 앞두고 갖가지의 방법으로 눈물 참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고이 모셔온 풍란 둘 (좌)금모단, (우)건국



 “밋밋한 잎만 쭉쭉 뻗은 난이 뭐가 그리 이뻐?”



  난을 살펴보는 아버지 등 뒤로 어머니가 시큰둥하게 묻곤 했다. 아버지는 어떤 매력에 빠지셨던 걸까? 요즘 들어 난이 점점 이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빠 나이가 되서일까, 아빠를 이해할 만큼 성장한 걸까.


  묵묵히 자기만의 리듬으로 천천히 한 장의 잎을 내는 풍란, 아버지와 풍란은 서로를 닮았다. 풍란의 잎은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하고 직선에 가까운 수려한 곡선이다. 또, 뿌리는 빨리 자라지 않지만 수분을 머금고 신중 뻗어나가 쉽게 말라죽지 않는다. 일 년에 2장 남짓 내며 천천히 성장하는 풍란이 피워내는 꽃은 엄지손톱만 한 순백의 꽃잎을 가졌는데, 그 자그마한 몸으로 향기까지 내뿜는다. 꽃말은 ‘참다운 매력’이다. 정말 참으로 예쁘지 않을 수 없다. 정도를 고집하며 우직하게 뿌리를 박고 자라나 고결한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꼭 아버지를 닮았다. 내가 데려온 풍란이 꽃을 피우면 꼭 아버지께 가장 먼저 개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 별 것 아니지만 알면 좋은 지식 몇 줄

난초과는 뿌리가 숨 쉬지 못해서 죽는 경우가 많다고..
축축한 것보다는 촉촉이고, 질퍽할 바엔 건조한 게 낫다.
축하 선물로 많이 받는 호접란은 사실 오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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