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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y 14. 2020

“그래, 난 의사다!”

<헬로우 블랙잭> 의사로 산다는 것

   부모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외가에 의사가 몇 있어서 그랬는지, 환자들을 돕는 모습을 기대했는지, 돈을 많이 벌어오는 직업을 원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고자 이과에 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쪽 길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제 성격상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재수하더라도 의예과에 가야 했다고 꽤 오랫동안 안타까워하셨던 걸 보면, 어머니께선 저를 꼭 의사로 만들고 싶으셨었나 봅니다.) 


   길은 어긋났지만 의사를 향한 마음은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만화책을 통해 기술과 헌신적 인류애, 열정을 갖춘 위대한 의사들을 만났지요.^^ <슈퍼닥터 K>, <갓핸드 테루>, <닥터 고토 진료소>, <의룡>, <최상의 명의> 등의 주인공이 그랬습니다. ‘손’ 뿐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람의 수준을 초월한 듯했습니다.      


   이들과 같은 의사지만 많이 다른 느낌의 의사가 있습니다. 이름은 사이토 에이지로라고 하고요, 아직 전문의가 아닌 ‘인턴’입니다. 그가 여러 병동을 돌며 겪는 인턴 체험기가 <헬로우 블랙잭> 속에 담겨 있습니다.  


   사이토는 일본 최고의 명문 에이로쿠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인턴입니다. 명석한 두뇌는 물론, 친구가 3시간 잘 때 2시간만 눈 붙이는 오기, 어려운 수술 실습도 마다하지 않는 근성까지 갖춘 인물입니다. 하지만 40만원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개인병원의 야간 당직 아이바이트를 해야 할 정도로 인턴의 삶은 고달픕니다.

   사이토는 아르바이트는 아르바이트대로 하며 대학병원에서 외과, 내과, 소아과, 신생아실, 암 병동, 정신과 등을 돌며 인턴 연수를 받습니다. 많은 환자와 새로운 만남, 치료, 죽음의 과정을 겪는 것은 물론 ▲치료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병원 ▲출세를 위한 의사들의 행태 ▲연명치료의 허와 실 ▲항암제 사용과 의료보험 ▲정신과 환자를 대하는 차별적 시선 등을 마주하며 1년 8개월의 시간을 보냅니다. 2년 연수 과정을 4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이 만화책 13권이 마무리되지요.


   -작가가 출판사와 갈등으로 13권까지 연재하고, 출판사를 옮겨 <신 헬로우 블랙잭>을 이어냈다고 합니다. 13권 이후의 만화는 국내에는 발행되지 않았습니다.-   

  

   <우조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등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가 그린 만화 중에 무면허 천재의사를 다룬 <블랙잭>이란 게 있답니다. (저는 처음 듣는 작품입니다.)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만화 제목을 <헬로우 블랙잭>으로 달았다고 합니다. 존경이 넘쳐서일까요? 이 책의 주인공 사이토는 천재과 의사들과는 거리감이 상당히 느껴집니다. 대학병원으로 무대를 옮긴 <미생> 속 장그래 같다고 할까요? (그래도 일본 의대 졸업생의 1% 안에 드는 수재라서 그런지) 의국과 선배들의 잘못된 모습에 분노하며 자기 소신을 자신감 있게 주장하는 모습에 ‘역시 주인공은 다르다’ 생각 들기도 합니다만,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힘없고 무능한 일개 인턴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대학병원 조직의 거대함, 열악한 의료 현실, 동료 의사 및 환자와의 갈등 등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죠. 그게 측은하면서도 나름 친근감이 듭니다.


   그동안 너무 훌륭한 의료 만화와 드라마들에 취해 저도 모르게 의사를 인간세계 위쪽에 있는 존재로 올려놨지만, 의사 역시 다른 이와 똑같은 사람이고 병원이라는 일터에 속한 직원입니다.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만나는 집사님이나 외사촌 누나는 너무나 당연히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기업으로서의 병원은 이윤을 창출해야 하고, 직원이 거기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실력도 있어야지만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정의감만 가지고는 버틸 수 없는 법이지요. 부딪치면 부러지는 법입니다. 인턴 실습을 하는 진료과가 더해질수록 의국의 법칙에 고개 숙이는 사이토의 모습은 남 같지 않습니다.     


   굳이 ‘X세대’임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저 또한 ‘비합리적인 구습과 이기적 집단주의에 따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그 구습과 집단주의 속 일원이 된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름대로 불합리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꺼내놓고 제 할 말을 하는 편이지만, 그건 지금까지 운 좋게 제 말을 받아주는 직책자와 선배를 만났기 때문인 면이 큽니다. “저 자식 다른 팀 보내”란 말을 한두 번 듣게 되면, 덤벼봐야 깨질 게 뻔한 상대에겐 이야기 꺼낼 엄두조차 내지 않게 되죠. ‘(보고받는) 고객을 자극하지 않도록’ 핵심 메시지를 피해 에두른 표현을 만들어내는 작문 능력만 쌓여갑니다. 변하는 않는 조직사회 속에서 존버가 되어갑니다. (갑자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구절이 머리를 스쳐갑니다.)     


   그래도 사이토가 극한 감정으로 쏟아낸 말들이 모두 소멸하지만은 않습니다.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곳이 조금씩 변해갑니다. 사이토의 객기 어린 말에 환자를 되돌아보는 의사가 있습니다. 삶의 의지를 잃었던 환자가 다시금 희망을 품습니다. 사이토 역시 과마다 만나는 좋은 지도의사를 통해 의국과 환자를 이해하는 의사로 성장해 갑니다. 나아가 이 만화에 담아낸 의료계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실제 현장에서 조금씩 개선되어 갑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습니다. 구성원 서로 “매니저님”으로 높이며 경어를 사용하고, 늦은 밤까지 계속되던 회식도 줄었습니다. 주말을 낀 1박 2일 행사도 사라졌지요. 직책자가 아닌 고객을 바라보고 일하는 툴도 많이 생겼습니다. 변화를 주문해온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불만으로 투덜거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혹 제가 나간 후에라도) 그 불만 거리도 해결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소 무거운 일본 의료계의 많은 문제를 대놓고 이야기하고, 정신과 연수 등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의사와 환자의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줘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면서도 만나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이해하고 교감을 나누려 하는 사이토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인턴을 마무리하고 몇 년이 지나면 분명 명의가 되어있겠죠? 마지막 순간 그의 다짐이 가슴에 전해져옵니다.


   “내가 전부 다 부숴버리겠어, 내가 전부 다 새로 만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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