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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y 31. 2020

“이런 게 일상이지, 직장인의 일상”

<미생>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

   제가 근무하는 회사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구성원들에게 학습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업무 역량 향상과 환경변화에 맞는 상품·서비스 개발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회사가 구성원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시기가 됐기에, 어디서든 자생력을 갖고 살아남도록 지원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직무는 물론 트렌드와 디지털 기술, 인문학, 세컨라이프 등 다양한 분야의 사내·외 온·오프라인 과정을 열어놨습니다. 심지어 교육을 잘 마친 구성원들은 포상까지 합니다. 덕분에 시간과 마음이 있다면 (여기에 직책자의 환경조성이 더해진다면) 마음껏(?) 자기 계발을 즐길 수 있습니다.     


   5~6년 전이었던가요? 만화 <미생> 속 사례와 전략, 협상, 커뮤니케이션 등 비즈니스 기술을 접목한 온라인 과정이 있었습니다. 수강 신청을 하면 9권짜리 <미생> 만화책 세트를 선물(같은 교재)로 줬습니다. 웹툰에서 시작해 만화책, 드라마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끈 <미생>이지 않습니까? 바로 수강 신청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들은 온라인 강좌의 내용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만화책은 제 책장에 아름답게 남아있게 됐습니다!^^     


   <미생>에는 직장인의 고민과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회사 전경과 사무실 모습처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잘 그려냈습니다. 직장인 이야기이지만, 확연한 계급구조 속 분리·차별의 사회를 힘겹게 버텨내는 이들을 말하려는 듯하기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바둑에서 따왔다는,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란 뜻의 <미생>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지은 제목입니다.     


   프로바둑기사를 준비하다 포기하고 원 인터내셔널에 입사한 장그래. 인턴 및 계약직 사원으로서 배우고 성장하는 그의 주변으로 이 사회가 지닌 갈등이 나타납니다. 대졸자와 고졸자, 낙하산과 공채, 정규직과 계약직, 남성과 여성, 영업과 스태프, 꼰대와 신입, 선배와 후배,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와 퇴직자 등으로 사람을 가르는 모습이 계속 이어지지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렇습니다.


   (그 역시 낙하산이고 대기업 종사자이지만,) 대부분 관계에서 인 장그래는 늘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입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바둑 뒀던 경험을 떠올리며,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에 우리는 박수를 보냅니다. 회사를 떠나며 “내 인프라는 내 자신이었다”고 되뇌는 장면에 감동하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장그래의 모습 속에 나 자신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수많은 이분법 가운데 소외되는 게 두려워서 한 가지라도 기득권 쪽에 있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는, 장벽을 깨는 장그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도 오랫동안 종합상사로 불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원 인터내셔녈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이나 사업 아이템들이 낯설지 않고 친근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만화는 만화인지라 (또, 드라마는 드라마인지라) 현실과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작품 속 비즈니스 모델과 상사맨들의 열정은 ‘007 가방 하나 들고 전 세계를 누볐던’ 선배 세대의 모습을 끌어온 듯합니다.

   정말 오상식 과장처럼 항상 충혈된 눈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인정받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주니어 시절 모 임원분께선 “상사맨이라면 며칠은 밤새우고 수염도 깎지 못해 부스스한 게 기본”이라며 “몸 어디 한두 곳은 문제가 생겨야 팀장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분을 만날 것에 대비해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등 초췌한 모습을 연출하는 선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해외 거래처에 생긴 문제를 처리하다 자기 결혼식장에 못 들어갈 뻔했다거나, 중국 기업과 가진 엄청난 술자리에서 살아남았다(혹은 죽었다 살아났다)는 등 무용담 몇 개씩은 저마다들 갖고 있었던 때였죠. 그런 게 패기라고 생각했던, 저보다 4~5년 먼저 입사한 선배들에게 악몽 같으면서도 이제는 추억으로 자리 잡았을 그 시절이 만화책에 담겨 있습니다.     


   현시대의 계급, 갈등 문제와 과거 비즈니스 사례들이 어우러지면서 <미생>은 서글픔과 분노, 향수와 판타지가 뒤섞여 현실보다 더한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생생한 듯하지만 디스토피아 같은, 회사원도 바둑고수도 아닌,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답을 찾은 것도 못 찾은 것도 아닌 묘한 중간지점에 <미생>이 놓여있습니다. 그게 직장인의 삶이고, 사람의 삶이던가요? 그래서 우리는 장그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나 봅니다.     


   주변에 장그래와 같은 이가 있으면, 비록 티끌 같을지 몰라도 자국이 남습니다. 그리고 조금씩이지만 세상이 바뀝니다. 장그래가 나가고 새로운 인턴이 들어오고... 회사는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만, 김동식 대리의 마음은 그대로이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회사였지. 그런데 왜... 외롭냐...’


   그만 그렇겠습니까? 장백기·안영이·한석율도 마찬가지고 <미생>을 읽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생으로 끝난 9권으론 부족해 시즌2가 나온 것이겠죠?^^ 그 시즌2에서도 여전히 미생입니다만, 점점 완생을 향해 나가리라 기대합니다. (작가분께서도 다음 편 집필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찌질이로 오늘의 직장생활을 하는 미생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한 지금,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복지부동’이 최고의 생존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게 일상이겠죠. 하지만 아무런 자국도 흔적도 남길 수 없는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장그래처럼 도전하는 삶을 꿈꿔봅니다. 어차피 살아있지 못한다면, 분명 뭐라도 해 보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 듭니다. 아니면 이참에 바둑이라도 배워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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