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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Jul 06. 2020

“미래에서 기다릴게”

<시간을 달리는 소녀> 아, 소중한 그 시절 수많았던 망설임이여...

   꼬마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방송됐던 미국 드라마 <타임머신>. 배우도 내용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재미있게 봤다는 느낌은 남아있습니다. 중세로 간 한 사람이 나무에 달려 죽을 뻔하다가 일식 날짜를 맞춰 위기모면을 했던 어떤(좀처럼 제목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화영화의 장면도 떠오릅니다. <백투더퓨처> 3부작 비디오테이프도 많이 봤네요. 저는 타임리프물을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타임리프물을 ‘꼭 보고싶다’고 찍어뒀다가 시청한 적은 없었습니다. 우연히 접한 게 오래 기억이 남았지요. 휴가가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뒤적이다 만났던 <어바웃 타임>, 그저 앤 해서웨이가 나온다길래 관람했던 <인터스텔라> 등이 그랬습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 2010년 전후 회사, 교회, 대학원, 동호회, 아니면 기자나 아내 등을 통해 이야기를 듣고 시청했을 텐데... 사람 기억이란 게 참 이렇습니다. 하여튼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됐습니다. 그 후 서점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만화책을, 이번엔 제가 확실히 다가가서 선택했습니다. 


   콘노 마코토는 남들보다 운이 좋다고 여기는 커트 머리 여고생입니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이 날은 운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늦잠을 잔 데다 불시테스트에 시험을 망치고, 조리 수업시간엔 요리를 불태우는가 하면 날라온 축구공에 머리를 맞기도 합니다. 이과실에 떨어진 작은 열매 모양의 물건을 주우려다 낯선 이의 기척에 놀라 심하게 넘어지기까지 하죠.

   진짜 큰일이 남았습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이모에게 복숭아를 전해주러 가는 길,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던 자전거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전거는 속도를 늦추지 못한 채 내리막길을 달려와 철도 건널목으로 돌진하고, 들어서는 열차 앞쪽으로 그녀의 몸이 떠오릅니다. ‘죽었구나’ 하는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고 나기 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있는 힘껏 달리면 과거로 타임리프를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마코토, 유달리 운이 없던 그 날로 몇 번이고 되돌아가 모든 것이 완벽한, 가장 운이 좋은 날로 만듭니다. 이렇게 그녀는 초능력자가 됐습니다.

   마코토에게는 소꿉친구인 츠다 코스케와 고등학생 때 전학 온 마미야 치아키란 절친 남사친 동기가 둘 있습니다. 함께 야구하는 것을 즐기는 친구들입니다. 어느 날 코스케가 후배 여학생의 고백을 받지만 거절합니다. 치아키와 함께 돌아오는 길, 혹시라도 셋이 쭉 함께 노는 게 깨질까 봐 불안해하는 마코토에게 치아키가 말을 건넵니다. “그럼 나랑 사귀면 되잖아?” 마코토는 어색하고 당황해 시간을 몇 번이나 되돌아가지만 사귀자는 치아키의 말은 변함없습니다. 치아키를 똑바로 보기가 어색해진 그녀는 결국 그날 치아키와 함께 돌아오는 길을 피하고 맙니다.     

   며칠이 지나 학교 복도에서 넘어지는 여학생을 타임리프로 구한 마코토. 얼굴을 보니 얼마 전 코스케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후배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코스케가 마코토를 좋아하기 때문이랍니다. 듣고 보니 완벽히 운 좋은 날로 돌려놨던 그 날 모습에 반한 것 같습니다. 정의감이 발동한 마코토는 다시 과거를 돌려놓기로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엄청 운이 없던 날 아침으로 돌아왔습니다. 둘을 맺어주려는 것이지요. 둘은 맺어줬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둘이 고장 난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이모에게 향합니다. 하지만 마코토에게 주어진 타임리프 횟수는 끝났습니다. 그렇게 둘이 죽는 그 순간, 진짜(?) 시간 여행자 치아키가 등장합니다. 사실 마코토가 이과실에 습득한 것은 치아키의 타임리프 보충제였고, 치아키에게 단 하나 남은 타임리프를 이번에 사용한 것입니다. ‘타임리프가 탄로나면 사라진다’는 룰에 따라 학교에서 떠난 치아키...

   이렇게 이야기는 끝나는 것일까요?     


   “타임리프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 같지 않구나.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타임리프를 사용해 친구들과 야구장, 노래방 등에 가서 놀고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 먹거나 놓친 드라마 시청, 시험문제 풀기 등으로 아낌없이 사용하는 마코토를 향해 이모가 하는 이 말이 무척 와닿습니다. 물론 마코토는 초능력과 같은 타임리프 능력이 무한정 주어진 줄 생각했기에 귀한 줄 모르고 막 썼겠지요. ‘그녀가 타임리프 제한 횟수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떠올려 봅니다. 만약 나였으면 정말 소중하게 ‘이때다’ 싶은 순간에만 사용했을까요? 하지만 그녀가 타임리프 한계를 알았더라도, 만약 제게 그 능력이 있었더라도 선택은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엄청 똑똑하고 합리적일 것 같은데, 실제론 참 미련합니다. 젊음의 소중함은 나이 들어서야 깨닫고, 지독히 아파봐야 건강관리에 나섭니다. 오염된 물과 미세먼지로 난리를 겪은 후에야 예전의 맑은 물과 공기 좋았던 지난날을 떠올립니다. 세컨 라이프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과 청년 시절이 금방 지나고, 20~30대부터 운동해야 건강한 노후를 맞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있다가 경쟁력 잃은 꼰대가 되고 만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몸과 마음은 그 시절이 무한한 것처럼 지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요?


   저 역시 어느덧 중년이 됐고, 뱃살이 두둑해졌습니다. ‘그때 고백했어야 했는데’, ‘고등학생 때 좀 더 공부할 것을’, ‘왜 나는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고 생각했지?’ 후회 들 때도 많습니다만, 그건 지금의 후회지 그 시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이모는 알지만, 고교생 마코토는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타임리프 잔여분이 다할 때까지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마코토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문득 타임리프 1회를 끝까지 품고 있는 이모가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코토의 타임리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힘들게 용기를 내 마코토에게 고백을 하고, 미래로 돌아갈 기회까지 날린 치아키였을까요? 아니면 마코토의 푸딩 먹을 기회를 놓친 동생이나, 100점 맞은 마코토로 인해 등수가 밀린 반 학생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날 마코토의 불운을 대신 떠맡게 된 그 누군가였을까요?

   (치아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그였겠지만) 딱히 대신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대상은 마코토가 아니었을까 생각 듭니다. 수많은 망설임으로 인해 누군가의 기억을 없애버리고 지워버리곤 했던, 그리곤 학창시절 치아키와 더 깊은 정을 쌓을 기회까지 놓쳤던 마코토 자신입니다. 마코토는 끝까지 세 친구의 우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코스케는 새 여자친구가 생기고 치아키는 미래로 돌아갔습니다. 셋의 야구는 이어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럴 바엔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고 치아키의 고백을 응시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갔기에 깨달은 사실이고, 언젠가 정말 “미래에서 기다리겠다”는 치아키와 기분 좋게 만날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고교 2학년에 불과한 마코토의 내일은 열려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화책을 보면서도 추억의 고교 시절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 제 고교생활 속에서 남녀공학의 설렘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순수하고 눈부셨습니다. 매일 비슷비슷한 일상이 이어진 것 같았지만 실제론 날마다 새로운 일들이 펼쳐졌던 그 시절에 대한 회상! 어쩌면 타임리프로 반복되는 풍경, 그 속에서의 다른 선택들을 보여주는 이 만화의 진짜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에게 동심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죠. 오늘 밤엔 제 고교 2학년 때인 1994년으로 타임리프를 하고 싶습니다. 마코토와 같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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