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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Oct 08. 2020

천명을 받은 자는 악운에 강하다

<쿠니미츠의 정치> 나라를 이끌 사나이의 정치 입문기

   정치인 관련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거나 기사들을 살펴보면 가끔 ‘이보다 더 X판일수는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미 ‘정치’란 단어의 뜻이 원래 의미보다는 ‘권력 행사·아첨·회유·선동·포장 등을 통해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과연 요즘 정치권 논쟁의 중심, 아니 근처에라도 ‘국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죽하면 일흔이 넘은 가수가 콘서트에서 국민에게 전한 이야기가 정치인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요? 참 안타깝습니다.     


   정치인들의 타락은 우리나라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떻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추태스런 모습들이 지속되면서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냉랭해지고, 이로 인해 정치판이 한층 더 볼썽사나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게 일반화된 현실입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악덕 장사꾼과는 달리 정말 국민의 시각에서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정치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쿠니미츠의 정치>는 그런 꿈을 지닌 인물의 정치 입문기를 코믹하게 그려낸 만화입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업인 메밀국수집 운영을 돕던 무토 쿠니미츠는 나라를 바꾸겠다는 큰 뜻을 품고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에도의 유명 국회의원 비서조직 최말단에서 가방담당 견습의 보좌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새롭게 이동한 신치바가사키. 이곳에서 쿠니미츠는 현의원 출신인 사카가미 료마의 제2 비서가 됩니다.

   사카가미 료마는 이 지역의 명성 높은 시장 사카가미 류타로의 아들로, 사리사욕 없이 청렴결백하지만 돈, 권력 등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현의원을 사퇴하고 지난번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마한 이후 더욱 쪼들린 삶을 살죠. 이번 시장 선거의 길도 순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쿠니미츠의 열정과 기지가 덧붙여져 선거자금 마련 및 참모 영입 등에 성공하고, 기존 시장 측에서 내세운 후보 선거운동 격전을 이어갑니다.

   여러 역경을 뚫고 시장에 당선한 사카가미 료마! 이제 1등 공신 무토 쿠니미츠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요?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참 읽기 즐거운 만화입니다. 제 느낌으론 일본의 또 다른 정치가 소재 작품인 <정치9단>과 견줄만합니다. <정치9단>은 거시적 관점에서 정치 세계의 빛과 그림자, 국제정세 속 일본의 위치, 정치인의 삶에 대해 찬찬히 표현해낸 작품입니다. 반면 <쿠니미츠의 정치>는 이 사회와 정치권이 품고 있는 문제점들을 소도시 선거 이야기 속으로 끌어와 녹여내면서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 역동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사회의 실상을 고발하는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얘기하기엔 그저 천진난만하고 청소년 만화답기도 합니다. 하여튼 정말 재미와 감동, 교훈을 두루 갖춘 정치만화입니다.    

  

   썩을 대로 썩은 지방의 작은 도시 신치바가사키는 우리 사회의 구린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시장과 건설업자가 담합해 주요 개발사업을 독점하는가 하면, 예산 소모를 위해 불필요한 공사를 이어갑니다. 시 공무원들은 시민들 식사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도시락을 시켜 먹고, 고위 공무원에게 줄을 대려는 업체들의 향응과 금품접대가 끊이지 않습니다. 시장의 권력은 아들 학교에까지 이어지고, 시장의 자리는 기존 비리를 유지해갈 수 있는 심복에게 이어집니다.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말 우울한 상황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회장 선거에도 관심 없는 녀석들이, 특히 3학년들은 년 후면 선거권을 갖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나 모르겠다고 무관심해선 만화 속 구더기 국회의원과 바퀴벌레 시장이 더욱 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거 때마다 개인의 소중한 의견이 담긴 표들이 사라지고 조직표들만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심이 선거권이 주어지는 딱 그 순간부터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 눈앞의 문제를 못 본 척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 참모인 아즈마 미츠아키가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신문부원에게 하는 질문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사회문제를 짚으며 국민의 참여를 이끄는 언론의 보도와, 애정 어린 관심으로 작은 사안에서부터 목소리를 내는 국민의 참여가 어우러지는 바로 그곳에서 정치 개혁이 시작됩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쿠니미츠의 모습은 정치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쿠니미츠가 추진하는 계획들이 먹혀드는 이유는 일반인이 겪는 어려움을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에 맞는 방안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어설픈 계몽주의 사상에 젖어 ‘훨씬 많이 배우고 똑똑한 내가 우매한 너희들을 깨우쳐 줄게’ 하지 않습니다. 혼자 잘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천명(天命)을 받은 사나이가 된 비결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요? 같은 눈높이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먼저 나서는 쿠니미츠의 주변에 사람이 모였고, ‘함께’ 난관을 극복하며 천운이 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위대한 법입니다.     


   이 만화에서 쿠니미츠의 정치 스승으로 나오는 사카가미 료마란 인물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사실 료마가 없었다면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다혈질 소년 쿠니미츠의 정치 입문기는 1권에서 벌써 끝났을 겁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뛰어난 스승이 먼저 있어야만 가능한 법이지요. 료마는 쿠니미츠에게 일본의 암울한 정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쿠니미츠를 통해 희망을 끈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부패한 현실을 직접 바꿀 힘은 없지만, 다음 세대를 통해 개혁되도록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그의 태도는 가슴 떨림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도 이 같은 인물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략과 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대부분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죠. 료마가 신치바가사키 시장에 당선된 건 판타지입니다. ‘국민이 호구가 아닌 유권자다’, ‘료마 같은 인물이 시장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작가의 마음이 담긴 권말부록이 아니었을까 생각 듭니다. (비록 만화지만) 료마 키드인 쿠니미츠가 앞으로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장차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를 것처럼, 훌륭한 사고와 생활양식을 지닌 숨은 정치인 ‘00키즈’들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새바람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도 품어봅니다.     


   <쿠니미츠의 정치> 주인공 같은 인물들이 실제로 정치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단 제 앞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꺼내놓고 이야기하며, 소중한 한 표를 바로 행사하는 것부터 해야겠지요? 이런 움직임들이 모이면 국민이 호구가 아닌 유권자로서, 정말 제대로 된 참정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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