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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Jun 20. 2020

“깜박했군, 칼잡이 발도재가 쓰는 검은 비천어검류야.”

<바람의 검심> 살인귀 칼잡이가 역날검을 든 이유

   ‘대형 사고’까지는 아니지만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전에 쓴 듯한데 올해 초 만화책을 조금 구매했거든요. 그때 <신의 물방울> 세트를 새 책으로 산 게 지출이 컸습니다. 새 것이나 중고나 올해 더는 만화책을 사지 않기로 아내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날이 늘던 3월초 ‘만화로 브런치를 쓰겠다’는 신청이 통과되고 집에 있는 만화책을 소재로 다루면서 왠지 만화책이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제목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만화>니까 제가 가장 좋아했던 Top 5 작품은 이야기해야 할 텐데, 소장하고 있지 않아 안 쓴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 중에서도 특히 더 좋아하는 작품 다섯을 꼽으라면 꼭 들어가는 게 <플라이 하이>, <슬램덩크>, 그리고 <바람의 검심>입니다. (나머지 둘은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비워두겠습니다.)


   대학교 앞 미용실인지 당구장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다가 잠깐 들춰본 <나그네 검객>이 인연의 시작이었지요. 순진하고 힘없어 보이지만 무서운 검술 실력을 갖춘 ‘치언’(해적판 속 그 이름이 아직도 생각납니다!^^)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볼에 칼자국 있는 떠돌이 무사가 예쁜 여주인공을 도와주고 잘 사는 한두 권짜리 단행본으로 생각했더랬죠. 그러곤 잊고 있었는데, 복학한 이후 제대로 된 <바람의 검심> 시리즈를 다시 만났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렵지만, 강한 마력을 가진 이 만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무렵 <용비불패>, <사무라이 디퍼 쿄우>, <열혈강호> 등 많은 무협만화를 만났지만 바람의 검심만큼 제 마음을 앗아가진 못했습니다. 당시 극장판으로 개봉됐던 영화도 봤고, Windows 98(OS가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정확하지가...) 바탕화면 테마도 <바람의 검심> 캐릭터로 채웠을 정도로 심히 취해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이었으니 여기서도 한 번쯤은 다루는 게 작품에 대한 예의 아니겠어요?^^ 마음으론 최상급의 도서를 구매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눈길을 살피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조심조심 알00을 검색하다 2만 원대 가격에 올라온 것을 목격했습니다. 단지 발견했을 뿐인데,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해 마음속으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막부 말 시기 ‘칼잡이 발도재’라 불리는 지사가 있었습니다. 쾌속의 검술을 사용해 수많은 사람을 벤 최강의 칼잡이로, 동란을 끝내고 메이지 시대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했지요. 그리고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시간은 흘러 메이지 11년, 얼굴에 칼자국 있는 떠돌이 무사가 활심검 사범대리 카미야 카오루 앞에 나타납니다. 발도제인 척하며 폭력으로 카오루의 도장을 뺏으려 하는 폭도 무리로부터 그녀를 구한 무사, 그가 바로 진짜 발도제 히무라 켄신이었습니다. 카오루와 인연을 맺은 켄신은 그녀의 집에 기거하게 되고, 거기서 부모 잃은 소년 묘진 야히코, 유신지사를 원수로 여기는 사가라 사노스케를 만나 우정을 쌓습니다. 그리고 약자들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끝나지 않은 유신을 뜻을 이어가기 위해 칼을 휘두릅니다.     


   “칼잡이라고 해서 좋아서 사람을 죽인 건 아닙니다.”

   켄신의 검술은 유파명 비천어검류(飛天御劍流), 확실하게 사람을 베어버리는 신속의 살인검입니다. 유신을 이룬다는 목적 아래 그는 악귀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베고 또 베었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시대를 맞았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던가요?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권을 잡게 되면 사람들은 변하는가 봅니다. 더는 개혁세력이 아닌 것이죠. 우린 역사 속에 이 같은 모습을 숱하게 보아왔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만화 속 세상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여기저기서 정권에 반기를 드는 데다, 약자들의 고통은 더욱더 커가기만 합니다.     


   여기에 켄신이 역날검을 든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은 폭력, 궁극은 살생이 검술의 본질이고 진실일지 모릅니다. 검은 살인을 위한 흉기일 뿐입니다. 그런 세계에선 아무리 칼을 휘두르고 휘둘러도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켄신이 그 진실을 잘 알고 있죠. 세상을 바꾸려면 이를 넘어설 꿈이 필요합니다. ‘불살’을 의미하는 켄신의 역날검은 그 꿈입니다. 그리고 이는 카오루의 활심류와 맞닿아 있습니다. 한 번도 자기 손을 더럽혀 본 적이 없는 이가 말하는 꿈같은 소리지만, ‘사람을 살리는 검’이 실현되는 시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입니다.


   문득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가 떠오릅니다. 동명의 뮤지컬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부르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아른거리네요. 세상 사람들에겐 허풍쟁이 미친 노인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비뚤어진 세상에 바로잡으려는 꿈을 실행에 옮기는 라만차의 기사였습니다. 켄신과 돈키호테는 무척 닮았습니다.     

실력자 켄신은 묘하게 허풍쟁이 돈키호테와 닮았습니다. (사진 출처 : 오디뮤지컬)

   “발도재, 네 본성은 역시 칼잡이야. 칼잡이는 죽을 때까지 칼잡이, 평생 벗어날 수 없어.”

   하지만 아무리 굳은 결의도 사람의 본성을 이기기는 힘듭니다. 특히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청부를 받고 켄신을 죽이러 왔던 우도 진에의 말처럼 켄신은 피 맛을 본 칼잡이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에를 죽여야만 카오루를 살릴 수 있는 순간, 그는 역날검을 뒤집을 뻔했습니다. 그랬다면 다시 살인귀 발도재가 됐거나, 떠돌이 무사로 돌아갔을 겁니다. 카오루의 전력을 다한 외침이 그를 막았습니다. 켄신을 위한 간절함이 자기 자신을 진에의 체면에서 풀려나게 했을 뿐 아니라 켄신까지 도왔던 것입니다.


   이렇듯 험한 길, 목표한 여정을 떠나는 발걸음에는 진심으로 함께할 동료가 필요한 법입니다. 켄신의 곁엔 그를 굳건히 믿고 기다리는 카오루, 뜻을 같이하며 힘을 보태는 사노스케, 몸과 마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야히코 등이 함께했습니다. 그의 삶은 막부 때나 메이지 시대 때나 계속 이어지는 전투로 늘 힘들었지만, 든든히 곁에 있는 이들로 인해 행복했을 겁니다. 그리고 불살의 역날검이 더욱 날카롭게 빛날 수 있었을 겁니다.     


   신념을 지키는 건 행복하지만 정말 어렵다는 걸 깨닫습니다. 환경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악은 반드시 드러나고 심판받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선한 영향력을 통해 악을 이겨내도록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지원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경영철학이 정말 잘 맞아떨어졌거든요. 신념대로 일할 수 있다는 게 참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업무가 업무다 보니 가끔은 씁쓸한 경우도 생깁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고, 제가 하는 행동이 고객을 위한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한두 번 자신을 합리화시키다 제가 악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도 생깁니다. (갑자기 <이태원 클라쓰> 속 박새로이가 나타나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치는 느낌이 스쳐 가네요~^^)


   그런데도 다행인 건 저도 운 좋게 켄신처럼 참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저보다 앞서 심각하게 하고 함께 걸어갈 길을 제시해주는 선배, 곁에서 공감 속에 응원의 손길을 보내는 동기, 꼰대 같은 제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에 더해 자기 길 만들어 가는 후배가 곁에 있습니다. 이 정도면, 나름 제 뜻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능가할 거야.”

   세월이 흘러 비천어검류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켄신은 야히코에게 역날검을 넘겨줍니다. 오랜 기간 최강의 검객으로 살아왔던 그의 역할이 후대로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그와 함께 불살, 활인검의 뜻도 야히코에게 이어집니다. 역날검을 물려받은 야히코는 아직 15살에 불과하지만, 곧 켄신을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때가 되면 물러나야 합니다. 이를 실천하는 이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너무 무리하면 탈이 나는 법이지요. 정도를 지나쳐 ‘나 아니면 안 돼’, ‘그 일은 내가 꼭 해결해야 해’ 라고 여기는 게 계속 문제에 문제를 낳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런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고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저의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에게 순수히 배턴을 넘기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 듭니다. 억지로 버틸 순 있겠지만, 그런 욕심으로 인해 야히코 같이 새 시대를 열어갈 사람을 막아서서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고요! 자리 보존하고 더 올라서겠다며 아등바등하는 것, 참 부질없는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그네처럼 와서 살다 가는 인생, 자기 특기를 제대로 갈고 닦아 주변의 사람을 지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칼잡이로서 쉽지 않은 그 길을 행복하게 걸은 것은 물론, 행복의 꿈을 이어주기까지 했던 켄신의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앞으로 가끔 제 꿈을 켄신의 역날검에 담긴 꿈에 빗대어 살펴봐야겠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많이 낡긴 했지만, <바람의 검심> 책을 구매한 건 정말 잘한 결정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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