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ven Lim Oct 31. 2020

“어느 때에 가든 묵묵히 뭔가를 계속 그리고 있었어요”

<바쿠만> 직업인으로서의 만화가, 꿈과 현실

   처제는 캐리커처 작가입니다.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이후 만화가의 꿈을 이루려 진로를 바꿨다고 합니다.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지만, 출판만화 시장 환경이 좋지 않아 생업을 위해 생업에 뛰어들었지요. 지금은 캐리커처를 그리면서 가끔 애니메이션센터, 방과 후 학교 만화 교사 등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을 보면 거리, 이벤트 행사장, 집 등지에서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활동의 연속입니다. 새벽까지 그린 후 서너 시간 쪽잠을 자고 일어나지요. 이후 아점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캐리커처 용품들을 캐리어에 한 아름 담아 집을 나섭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바쿠만>은 결혼 후 만난, 비교적 최근(?) 만화입니다. 2012년 겨울, 20권으로 완결된 만화책을 서점에서 봤더랬죠. 제가 무척 좋아하는 그림체를 가진 오바타 타케시가 작화를 맡은 데다, <데스노트>를 작가 오바 츠쿠미가 다시 뭉쳐 작업한 작품입니다. 제목이 뭔 뜻인지도 몰랐지만, 서점 가판대에 놓인 표지만으로 제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습니다. 펼쳐보니 소년 만화주간지에 연재하는 만화작가를 다룬 작품입니다. <바쿠만> 두 작가의 소년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처제가 몸담았던 만화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만화 독서에 더욱 빠져든 듯합니다.     


   만화가였다 일찍 죽은 삼촌을 둔 마시로 모리타카.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장래 꿈이 없는 14살 소년입니다. 좋아하는 동급생 아즈키 미호에게 말도 못 건네는 소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시험을 앞둔 어느 날, 그녀를 그린 노트를 학교에 두고 온 걸 전교 1등 타카기 아키토가 보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 게 꿈인 아키토는 글재주는 대단하지만 그림 솜씨는 없었지요. 함께 만화가가 되자고 모리타카에게 제안합니다.    

   아키토는 모리타카를 미호의 집으로 데려가 “만화가가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합니다. 아키토와 미호의 대화를 통해 미호가 성우를 꿈꾸고 있단 걸 알게 된 모리타카, 그녀에게 “내가 그림을 그리고 아키토가 스토리를 맡을 거야” 이야기하며, 자신이 그린 만화가 애니메이션이 되면 여주인공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꿈이 이뤄지면 결혼하자는 프로포즈까지 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프로포즈를 수락한 미호! 하지만 둘은 ‘모리타카 연재만화가 애니매니션 제작으로 이어지고, 여주인공 성우를 미호가 맡게 되는’ 꿈을 이룰 때까지 만나지 않고 메일로 격려만 하기로 약속합니다.

   이제 필명 ‘아시로기’란 이름으로 콤비를 이룬 모리카타와 아키토. 이들의 10년에 걸친 도전이 펼쳐집니다.     


   세상에 어찌 편한 직업이 있겠습니까마는, 만화가란 건 정말 어려운 직업이군요! “만화가로 일해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박사’” 라는 모리카타 삼촌의 말이 와닿습니다. 직업이란 결국, ‘되기’가 아니라 ‘살기’가 중요하지요. 삼촌 또한 <초 히어로 전설>을 연재한 경험까지 있지만, 만화로 살기에는 이르지 못한 ‘만화가를 꿈꾸는 도박사’였습니다. 그 도박에 빠져 죽음을 맞기까지 했습니다. 만화가는 신이 내려준 재능을 지닌 천재들의 영역인 것일까요?  


   하지만 이 만화 도박사들은, 그저 한방을 바라며 베팅하는 종족은 아닙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승낙받고 삼촌이 쓰던 작업실을 물려받은 모리타카, 그가 거기서 만나게 된 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콘티 박스들입니다. 실제 원고로 그려진 건 그 중 몇백 분의 1의 불과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페이스로 그렸기에 이렇게 많이….’는 모리타카 놀람과 제 감정이 겹쳐집니다. ‘도박처럼 살다가 자살했다’고 여겼던 모리타카의 인식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엄청난 콘티박스들은 직업인으로서 만화가가 되기 위한 삼촌의 근성 어린 지속된 도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자뻑, 노력, 운이란 3대 조건을 갖추면 만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른 영역에서도 초천재가 아니라면 운은 중요합니다. 몇 년 전 읽었던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란 책이 떠오릅니다. 물론 남보다 뛰어난 재능과 밤을 지새우는 열심이 성공적인 직업인이 되는 요소이긴 합니다만, 사실 비슷한 무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차이는 백지장 한 장 정도 두께도 되지 않습니다. 90점과 50점은 확연히 구분되지만, 89.9와 90.0은 거의 분간할 수 없습니다. 모두 실력 있고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부차적인 여러 다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17년 전 신입사원 전형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게 참 불가사의합니다. 면접 순서가 잘 배치됐거나, 제 어떤 답변이 면접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을까요? 어쩜 그날 컨디션이 무척 좋아서 말이 술술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마치 처음부터 무척 뛰어난 자소서 작성, 면접기술을 가진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는 같잖은 제 모습 하고는…. 참 웃깁니다. 회사 사장님께서 “살면 살수록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구기일이란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요, 맞습니다! 우린 평생 먹고살 직업인을 꿈꾸며 부단히 노력하는 도박사이고, 참 운 좋은 사람입니다. 이를 느끼게 되면 삶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요새 “똥차가 빠져야 시대가 바뀐다”며 대놓고 임원, 팀장님을 구박하는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여기까지 온 것도 큰 은혜인 것을…. 노력하되, 따르지 않는 것엔 겸손해져야겠습니다.)     


   그래도 만화는 만화인 만큼 해피엔딩인 게 아름답고 독자에게 희망을 줍니다. <바쿠만>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천재 만화가 니즈마 에이즈를 위시한 여러 작가들, 냉정한 편집부 등 속에서 치고받으며 10년을 지내온 아시기로는 만화잡치 독자층의 큰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애니메이션화에 이릅니다. 그리고 성우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아즈키 미호가 공개오디션을 통해 해당 작품 여주인공 배역을 따냅니다. 재능으로 노력한 이들에게 '운'이 따라주었습니다. 이처럼 꿈이 현실로 구현되며 대단원이 마무리됩니다.

 

   만화책인가 그냥 책인가 할 정도로 엄청 글이 많은 작품, 하지만 그만큼 읽는 재미를 더 느꼈던 <바쿠만>이었습니다. 꿈은 꿈꾸는 상태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완성되면 그 의미가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도박사보다는 만화가가 직업인으로서 뽀대(?)도 나고요! 저도, 눈 비비며 일어나 매일같이 구를 챙기는 처제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꿈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첫권과 마지막 권의 제목이 '꿈과 현실'로 같습니다. 수미상관, 대구를 이룬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이전 28화 “깜박했군, 칼잡이 발도재가 쓰는 검은 비천어검류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