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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Jul 19. 2020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거의 같거든요.”

<닥터 프로스트> 공감 제로 심리학자의 100% 상담 치유기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저는 살이 찌지 않은 체질인 줄 알았습니다. 웬만하면 제게 후한 점수를 주는 대학 동기 아내마저 그때의 저를 “패션 센스 꽝인 말라깽이”로 기억하는 걸 보면 정말 말랐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의 규칙적인 생활 덕분(?)일까요? 제대 이후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서른이 되고 결혼한 이후부터 부쩍 살이 쪄서 요즘은 조금만 더워도 땀과 짜증이 차오를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마흔이 지나서는 밖에 나가 뛰어놀기보다는 에어컨 바람 나오는 실내에 앉아서 보고 듣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 근처에 북카페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 북카페는 제법 있는 편인데... 이동진의 ‘빨간책방’ 등 가까운 위치에 있던 곳들이 사라져 아쉽습니다.) 홍대입구 앞에도 ‘카페 꼼마’라는 이름의, 출판사 문학동네가 만든 북카페가 있었습니다. 고단한 일상 뒤의 쉼과 위로를 느끼는 듯했고, 당시 저희 팀이 회사에 라이브러리 카페를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기도 해서 자주 찾곤 했습니다. 카페를 가득 채운 책과 커피의 향이 어우러져 느낌이 좋았습니다.     

홍대입구 역 근처에 있었던 '카페 꼼마'.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문학동네가 문학 작품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이다 보니 관련된 책들만 많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문학 동아리였다는 것 하나로 ‘문학 소년’이었다고 쭉 이야기해오고 있지만, 가끔은(어쩜 자주)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책이 끌리는 법이죠. 그날은 그랬습니다. 조석, 최규석 등이 그린 책들 옆에 있는 <닥터 프로스트>라는 만화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닥터 K>나 <의룡>, <갓핸즈 테루> 등 외과의사 만화를 떠올리며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닥터가 그 닥터가 아니라 심리학 교수를 말하는 것이었군요! 저는 이렇게, 웹툰으로 시작해 만화책은 물론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이후에서야, 하얀 머리 천재 심리학자 백남봉과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사고의 충격으로 전두엽에 손상돼 감정을 잃게 된 아이 백남봉. 하지만 상대적으로 논리 추론 능력이 천재적으로 발달했습니다. 6개 국어 정도는 기본일 정도로 지능도 뛰어납니다. 그는 임상심리학의 권위자인 천상원 교수의 지도로 심리학을 공부한 이래, 관찰·추론 능력 및 수백 수천 가지 심리상담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대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의 심리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 나갑니다. 이를 바탕으로 초고속으로 용강대 심리학과 정교수에 임용됩니다. 서릿발과 같이 하얀 머리 색깔을 지녀 ‘닥터 프로스트(frost)’로 불리는 백선생, 학내 심리상담소 조교로 들어온 윤성아와 함께 다양한 상담사례를 접하며 심리치료를 펼쳐갑니다.     

   사연 있는 천재 교수를 통한 다양한 심리치료 사례 소개 같았던 만화는 시즌 2를 지나며 커다란 음모 앞에 서게 됩니다. 프로스트 교수와 친했던 형이자 비범한 능력을 지닌 문성현이 등장하죠. 그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불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사람 심리를 조정하려 합니다.천상원 교수는 그의 음모를 막으려다 죽고, 프로스트는 잃었던 감정을 되찾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사라졌던 감정이 돌아오며 심한 공황장애를 앓게 되지요. 그새 조교였던 윤성아는 교수가 됐고, 교수였던 그는 (머리는 그대로 하얀) 백남봉이 됐습니다.

   이제 둘과, 또다른 많은 사람이 팀을 이뤄 문성현의 실체를 쫓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논문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첫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952년,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고든 엑스너는 자신의 가장 유명했던 논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 지구 상에 사람들이 60억 명 있다면 그들의 심리상태와 기질, 성격은 전부 달라서 전부 60억 가지의 심리와 성격, 기질이 있는 것이다. … 인간은 모두 특별하다.’

하지만, 고든 엑스너는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논문에서 말을 바꿔 이렇게 끝맺었다.

‘그건 사실, 사람 대한 60억 가지 표현일 뿐이다. …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    


   마침 <닥터 프로스트>를 마주친 게 막 40대에 접어들던 시절.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다시금 깊이 되살펴 보던 때라 그런지 세 페이지에 걸친 이 글이 마음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모두 다름’과 ‘누구나 같음’ 사이에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고 자문도 해보았습니다. (해당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계속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순식간에 빠져들었습니다. 카페 꼼마에 있었던 두 권의 만화책을 읽은 것은 물론, 인터넷을 검색해 그때까지 연재된 <닥터 프로스트>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살펴봤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연재물을 이어보고 있습니다.      


   심리학은 사회'과학'이란 걸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 같기도 한 프로스트라는 인물, 참 매력적입니다.

   상대의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그지만, 그렇기에 동정이나 편견도 없습니다. 내담자의 행동과 이야기에 더욱 주의 깊게 집중할 수 있고, 관찰과 경험 및 그가 가지고 있는 통계를 바탕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갑니다. 수많은 데이터를 정확히 분석해내는 그는 인공지능(AI)과도 같습니다.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반대로 공감한다면서도 실은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심리학을 어설프게 ‘척 보면 압니다’라고 말하는 무당처럼 인식하듯, 어쩌면 우린 ‘첫인상’,‘느낌 같은 느낌’ 등 단편적 인상과 한두 번의 정서적 교류만으로 ‘저 사람을 다 안다’고 재단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껏 몰랐네’, ‘그런 사람 아닌데’, ‘완전 속았구만’ 등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건 상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인식하고 믿었던 내 탓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탁월성은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입력값과 결과값 매칭이 잘못된 학습을 AI에 계속 시키면, 바른 답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릴 적 사고 이후 쭉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바른길을 제안했던 천상원 교수가 있었고, 그를 따르며 지원하는 윤성아도 있습니다. 철부지 조교였던 윤성아는 시즌4에 이르러서는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백남봉(감정을 회복한 시즌4에서는 ‘프로스트’가 아닌 ‘백남봉’으로 이름 부르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을 도울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정의의 편에 서서 남봉과 함께하는 형사들과 신문기자도 있지요.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백남봉은 거대한 음모를 가진 윤성현에게 맞서기는커녕 자신의 병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심리치료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성장에 있어서도 혼자가 아닌 여럿의 협력이 중요한 법입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참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다른 사람 얘기인 것처럼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신병원에서 겪는 사례로 그려낸 시즌3도 무척 인상적이고요. 즐겁게 보다가 뒤늦게 숨겨진 반전을 깨닫게 된 느낌이랄까요? 그만큼 오묘한 사람 심리에 관한 관심도 더 갖게 됩니다.


   물론 <닥터 프로스트>를 읽는다고 60억 인구의 마음을 다 알거나, 한 사람 마음속에 깃든 60억 개의 인격을 깨닫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만, 가끔은 저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제 마음을 조금은 더 들여다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업무와는 큰 상관이 없는 DISC와 에니어그램 등의 강사교육을 받고, 심리상담사 자격을 취득한 것도 이 만화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 듭니다!


   다르지만 똑같은 인간,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심리학, 사람 마음에 관심 있다면 <닥터 프로스트>를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절판된 옛 책 찾지 말고 웹툰으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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