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망가는 습관

습관 어디 안 간다는 말

by 조희진




인연이 정리된 사람과 함께 했던 곳에서 떠나고자 했다. 떠나지 않는다고 우연히라도 마주 칠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도시를 옮겼다. 가끔은 나라를 옮기기도 했다. 지난 인연과 다시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보다는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리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마치 실연을 당하면 머리를 자르는 심리처럼 나 홀로 온전히 내면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와중에 내면이 정리되거나 가다듬어질 수는 없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눈에 보이는 변화와 갑자기 닥친 낯섦이 그나마 나를 꾸역 꾸역이나마 나아가게 했고 억지로나마 마음이 멀어지게 했다. 그렇다고 감정이 회복되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할 집을 찾고, 돈을 벌 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누구보다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내 능력밖의 것들을 하나씩 제외하면 선택하기 수월할 만큼 작은 부분만 남아있었다. 집도 그랬다. 가지고 있는 경제적 조건 안에서 버스가 다니는 큰 차도 옆에 위치했다던가, 북향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집과 같은 최악의 조건을 거르면 크기가 작아도 내가 가진 비용과 조율할 만큼의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낯선 곳에 내 던져진 김에 나를 더 알아가는 과정을 겪다 보면 어느새 조금은 더 나은 내가, 혹은 조금은 달라진 새로운 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돌아보면 이 대부분의 대범했던 떠남과 변화는 엎질러진 일을 수습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이 가 도망가는 방식이었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게 나를 멀리 보내고 그게 최선이었다며 해보는 자기 위안이었고 맞서지 못하는 이의 변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타고난 성향이라고 제버란 남 못주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인연을 마무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흔이 넘어서도 새로운 일을 배워볼까 기웃하는 내 모습을 보면,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에서도 도망가는 내 모습이 비치는 듯해 흠칫 놀라게 된다.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밀고 부치는 것 - 이런 문장은 나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 성취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본 적도 크게 생각나지 않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상황은 늘 어렵고 우울한 기억으로 가득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너는 욕심도 없냐, 남들이 더 잘하는 것 보면 샘이 나지 않느냐고 아쉬운 소리를 하셨던 것 보면 타고나길 욕심 없는 혹은 남이 잘하는 것에 관심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예술 행정을 공부하고 석사를 시작하며 동시에 이름만 대면 모두 아는 갤러리에서 인턴쉽을 시작했다. 논문 쓰랴 인턴 하랴, 그 와중에 사설 갤러리에 파트타임 일도 시작해 3배는 압축해 놓은 듯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베를린 비영리 단체에서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전시도 종종 준비하며 현대미술과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예술계는 있으면 있을수록 모르겠다 싶은 즈음 타이밍 좋게 코로나로 모든 독일의 상점과 예술 공간이 약 1년은 꽁꽁 닫혀있었다. 이때다 싶어 생전 모르는 회계분야로 지원을 하고 운이 좋게도 4년간 직장인으로 회계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다시 예술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요즘, 한편에는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배워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이게 과연 배움의 욕구인 것인지 내가 하던 일에 대해 확신이 부족하고 성공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드는 생각인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딴생각 말고 열심히 전시 보러 다니자.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6화불운 다음은 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