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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만국 공통

독일 크리스마스는 로맨틱하지 않다. 명절이니까.

by 조희진

오전 8시 포르투갈에서 지원과 휴가 중인 파블로에게 메시지가 왔다. 한글로 친절하게 쓴 짧지 않은 메시지였다.


"잘 지내? 나는 지원과 포르투갈에서 여행 중이야.

우리는 어제 올해 크리스마스 연휴에 대해 얘기해 봤어. 이번에는 나 혼자 엄마집에 가기로 했어. 우리 엄마가 지원에게는 조금 힘들 수도 있어서. 핑계로는 이번 크리스마스는 희진이가 베를린에서 혼자라서 지원이 같이 보내 주기로 한다고 말하려고 해.


그런데 사실은 반대인 상황이잖아. 지원이 혼자 보내야 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지원이 혼자 있지 않도록 네가 같이 있어주면 진짜 좋을 것 같아. 발터가 너무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엔 발터도 혼자 엄마집에 간다면, 엄마들이 자기 아들들과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포르투갈에서 따뜻한 인사 보낼게, 발터에게도 안부 전해줘�"


한글을 꾸준히 독학하는 독일인 파블로의 완벽한 한글 메시지가 인상 깊었고, 여자친구가 혼자 있을까 배려해 여자친구의 친한 친구인 나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는 다정함에 웃음이 났다. 잠시 메시지를 읽고 생각해 보면 다정하다 못해 이렇게 현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독일인에게 12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은 마치 추석연휴와 동일하다. 오랜만에 떨어져 사는 부모와 자식이 모이고 그간 어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물을 준비하고 교환하는 따뜻한 시간이자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가. 족. 이 모. 이. 는. 시. 간'. 전 세계 어디나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스트레스도 받는 명절 연휴인 것이다.


굳이 자주 보지 않아도 괜찮다. 이는 시어머니와 자꾸 부딪히고 스트레스받는 아내를 보호하는 파블로의 방식이었다. 지원은 직업상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한창 바빴고 얼마 전 베를린에 놀러 오셔 집에서 며칠 지내고 가신 시어머니를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꼭 보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파블로는 이번 크리스마스는 너 혼자 엄마를 뵈러 가는 게 어떻냐는 지원의 말에 동의했고 더불어 혼자 집에 있기로 한 아내가 혹여나 외로울까 싶어 그럴싸한 방법까지 모색한 것이다.


가까이서 지원과 파블로 부부를 보아온 나로서는 그들 사이에 만만치 않은 홀로 사시는 시어머니가 있음에도 둘 사이가 돈독한대에는 그들의 태도가 큰 몫을 한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불편한 말에 지원은 마음속에 담아두고 묶혀두는 대신 그 자리에서 표현하는 성격이다. 순간 분위기가 싸하고 얼음장이 되는 상황도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그 불편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시어머니의 불편한 언행으로 남편에게 불만을 표할 일이 없다. 지원에게 불편한 사람은 남편이 아닌 시어머니이니까.


파블로는 중간에서 눈에 띄게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원이 불편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남편이다. 눈치 백 단인 그는 종종 생기는 아내와 어머니와의 긴장감을 잘 알기에 얼음장 같은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순간에 크게 불만 없이 그 순간을 그들과 함께 견뎌낸다. 그리고 되도록 둘이 만나는 자리를 최소화하는 센스도 있고.


아마 지원은 모를 것이다. 자기 남편이 어제 대화 후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몇 년 전 나 혼자 축축하고 어두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을 때 지원이 저녁식사를 초대하고 함께 옆 도시로 산책을 갔던 기억이 났다. 그 후 크리스마스 때마다 각자 파트너들의 고향에 가느라 함께 보낼 수 없었는데 오랜만에 둘이 함께 아무도 없는 한적한 크리스마스 거리를 산책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추억이 되겠지. 아니면 같이 따뜻한 온천지역으로 여행을 가자고 해볼까? 아내를 챙기는 마음이 가득한 메시지에 나도 덩달아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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