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위한 선물에 인색하신 분들 모이세요.
겨울만되면 뜨개질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다 갑자기 실을 산다. 이왕 노동력 들이는 거 오래 잘 입을 것을 만들어야 한다며 캐시미어 혹은 좋은 질의 양모의 비싼 실을 산다. 어제 아침도 역시 독일 가을답게 머리 바로 위에까지 구름이 얹어진 것 같은 무겁고 어두운 날씨였지만 뛰었다. 뛸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럼, 나간 김에 실을 사 오자는 마음으로 운동복을 챙겨 입었고 마침 실을 파는 가게까지 약 3킬로의 거리이기에 적당하다 싶었다.
뛰기 싫음 마음에 비해 3킬로는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잠깐 서서 실을 고르자니 뛰어오며 데워졌던 몸이 빠르게 식는 게 느껴졌다. 더 추워지기 전에 급히 세 개를 골라 집었다. 두 개는 겨울용 헤어밴드를 뜨기 위한 분홍이 들어간 모헤어 양털과 하나는 손목이 시려서 무언가 손목을 위해 떠볼까 하고 짙은 파랑의 양모 실. 실 색에 대해서는 너무 가볍게 결정한 면이 없지 않아 집으로 다시 뛰어오면서 실 색에 대해 생각했다. 몸이 식어 추워질까 너무 여유 없이 고르느라 생각지도 못한 분홍을 고른 건 아닐까 하고. 분홍은 특별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큰 호불호 없는 색이다. 단, 내 옷이나 소품에는 몇 없는 색상이다. 그런데 가끔 하나 있는 분홍색 스웨터를 입을 때마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했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막 나오는데 문 옆에 걸린 100% 캐시미어로 잘 짜인 다리용 토시가 색색별로 곱게 걸려있었다. 발목부터 무릎 위까지 덮을 수 있는 긴 길이로 추운 겨울 넉넉한 스타일의 바지 안에 입으면 따뜻하니 유용할 것 같았다. 가격도 25유로라니, 내가 직접 떠도 실값으로 만 25유로가 넘을 듯하기에 만져보니 역시나 보들보들 폭신폭신 고급진 제품이었다. 동시에 곧, '크리스마스인데 안드레아 선물로 좋을 것 같은데? 이 가게 다시 오기 귀찮으니 지금 당장 살까?' 한 3초 정도 고민하다 '우선은 뛰어가야 하니까 가방 무거우면 안 좋지, 다음에 다시 오자'라며 1차적 충동구매할 뻔 순간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저 탐나는 토시를 보고 갖고 싶다는 생각대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고 먼저 생각을 했을까? 나도 필요한 것이고 누구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는데 말이지. 정작 나는 장갑도 몇 년 동안 겨울 내내 써서 낡을 대로 낡은 것을 끼고 있고 늘 추워하지만 토시 따위는 살 생각도 못했다. 25유로 캐시미어 토시는 내가 쓰려고 사기에는 살짝 망설여지는 가격인데 남을 위한 선물로는 충분히 바로 구매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지난달, 내가 독일에 있어 자주 못 보는 한국의 친구와 가끔 전화통화만 하다 2년 만에 얼굴 보고 만났다. 무엇보다 친구의 얼굴이 너무 좋아지고 에너지가 한층 풍만해진 것이 느껴졌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랫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었고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몸이 힘들어지고 바쁜 생활이 더 버거워짐을 느끼다 보니 문득 자신이 너무 자기를 케어하지 않고 살았다고 이제는 자기를 좀 더 중심에 두고 자기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고 했다. 필라테스 회원권을 구입하고 옆사람 챙기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운동시간을 늘리며 하루를 조금 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았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 잘되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스스로 챙겨야지. 그게 제일 중요하지'라고 맞받아 대꾸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로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뜨개질을 할 때마다 누구에게 무엇을 떠줄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가 무엇을 받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안 받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뭘 먹어도 괜찮으니 상대방이 원하는 식당에 가는 것이 편했고 아직도 그게 편하다. 그런데 앞으로는 조금씩 바꾸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누군가를 덜 챙기고 덜 배려하겠다는 뜻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을 자꾸 물어보고 대답할 수 있어야 나도 나를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먼저, 나 나 스스로가 나를 잘 알아야 남에게 내가 누군지 잘 표현할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