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생긴다는 그 병
유럽의 겨울은 남다르게 춥다. 하지만 온도로만 비교해 보면 한국이 훨씬 낮다. 스칸디나비안지역이 아닌 이상 유럽은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한국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렇지만 뼈가 시리도록 춥다. 겪어본 자면 아는 몸이 아픈 추위다. 한국의 겨울이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건조한 차가운 날씨라면 유럽은 북대서양 저기압의 영향으로 바닥도 벽도 늘 축축한 것 같은 습하고 구름 많은 캄캄한 겨울이다.
나이가 들수록 피부관리를 위해서는 선크림이 필수라며 실내에 있어도 바르라고 모두가 말해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여름에만 바른다. 독일에서 여름 이외의 계절은 해가 안나는 시간인데 정말 선크림을 바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심이 가득하다. 최소 4개월, 11월, 12월, 1월 2월은 독일에 나무도 건물도 사람도 그립자가 없다. 해가 보이지 않으니까.
한국 겨울이 익숙한 이들에겐 쉽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영하 15도의 추위에도 하늘만큼은 맑고 쾌청한 날이 많으니 선글라스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독일은 두꺼운 구름이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기분이다. 공기가 나를 잔뜩 짓눌러 꼼짝 못 하겠는 그런 기분. 주변의 이제 막 독일로 온 유학생들이 첫해, 둘째 해 겨울을 나면서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나도 예전에 느꼈던, 병인줄 알았던 그런 증상들.
"날이 밝았는데 내 몸은 왜 이렇게 안 일어나지죠? 아침에 눈을 떠도 몸은 물먹은 스펀지 같아요.
이게 아픈 건지 모르겠는데 뭘 할 수가 없어요. 몸이 이상해요"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이렇게 겨울을 나고 새해가 밝고 겨울 끝물에는 정신 못 차리는 몸의 상태가 되어있다. 딱히 아픈 곳은 없는데 온몸이 아프달까. 몸의 아픔은 시작일 뿐, 마음의 병도 생긴 것 같다.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나 우울함 크게 못 느끼는 사람인데 그냥 기력이 너무 없네,
아무것도 못하겠다 보니 기분도 점점 가라앉고.. 이게 우울인가?"
매해 겨울마다 반복되는 무기력, 잦은 감기, 열은 안 나고 아픈 곳은 없는데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나다닐 수 없는 그런 체력저하상태를 나중엔 독일병이라고 불렀다. 이런 친구들이 결국 한국에 다녀와야겠다며 한 달을 한국에서 엄마밥 먹고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마치 새로 태어난 눈빛이다. 한국의 생기를 그대로 가져왔달까. 부러운 듯 바라보며 그 생기 부디 오래갈 수 있기를, 주변에 나눠줄 수 있기를 바랐다.
한동안 나는 겨울이 되면 커피와 와인 소비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었다. 특히 레드와인은 늘 집에 두어 병씩 쟁여둘 정도로 즐겨마셨고 또 하나, 초를 가득가득 구비해 놓았다. 짙은 회색의 캄캄한 아침에는 온도가 낮지 않아도 마음이 춥다. 그럴 때 초하나 테이블 위에 켜놓으면 마치 성냥팔이소녀처럼 온 집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마흔이 넘고 술과 카페인을 줄여가면서 레드와인으로 가득했던 겨울의 낭만을 조금은 포기했다. 술을 안 마시는데 왜 더 추운 기분인진 모르겠지만, 그 대신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습하고 어두운 독일 겨울의 장점도 하나 있는데, 몸을 움직이면 금방 추위가 덜해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온도가 대부분 영상이다 보니 나가서 살짝 뛰기 시작하면 금방 바깥온도에 적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야외운동을 못하는 이유는 매일 비가 오니까. 방수 바람막이를 입고 뛰는 것도 시도해 보았는데, 문제는 신발. 잔디가 많고 흙이 많은 우리 동네는 부슬부슬 비 오는 날 한 바퀴 돌고 오면 양말까지 다 젖어있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는 선호하지 않아도 실내 운동을 가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