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의 이야기
연아. 밥 먹을래? 테이블 문 앞에 뒀어. 어서 식기 전에 먹어.
덜 커 더-
문이 열리고 연이 머리와 손만 내밀어 나를 향해 꾸벅 - 고개를 숙이고는 테이블을 갖고 들어간다. 이제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으려나 기대했던 게 섣부른 생각이었나 보다. 좀처럼 대꾸를 하지 않는 연에게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고,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하지만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본다.
(……)
먼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하다. 이내 체념하고 자신의 밥을 마저 먹은 뒤, 마을 생활 안내 책자를 꺼내어 펼친다.
선자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자 마을은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선자 마을은 모두 일을 해야 합니다.
선자 마을은 서로 항상 존중합니다.
어떤 구성원이든 일을 해야 합니다. 마을 바깥에서 하던 일이 선자마을 내에도 있다면 그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최대 세 개의 직업까지 선택이 가능하며 한 가지의 일까지만 필수입니다. 기본 근무 기간을 마치고, 직무 변경 신청이 1년에 2회까지 가능합니다.
거리의 쓰레기를 줍거나 마을 책자의 수량을 세고 정리하는 일을 하기고 하는 등의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일의 양과 범위, 종류가 다양하고, 배정이 기본이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 겸업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두 가지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할지 사실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배정을 기다렸다.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는 의욕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장을 넘겼다.
배정받은 직업 외의 일을 선택하고 싶다면 아래의 장소를 먼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을청 (행정 / 돌봄 / 안전)
도서관
학교
공장
농장
식당
상점
음악관
공중목욕탕
영화관
미술관
공방
미용실
의상실
건축소
운동관
…
생각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인상 깊었던 건 마을청의 세 개 부서. 행정청은 마을 바깥의 것과 같을 것 같고,, 돌봄청이 있다는 것이 가장 궁금했다. 어떤 돌봄을 책임지고 있을까. 안전청은 아마도 의료와 소방, 경찰 업무를 일임하는 거겠지.. 일단 곤충 농장에서 일을 해보고, 언제든 아니다 싶으면 직무 변경을 신청하자 다짐해 본다.
조용히 방문이 열리고 빈 접시들이 자그맣게 달그락거리며 문 앞 바닥에 놓였다. 다른 음식은 모두 깨끗이 비웠지만 빵은 그대로 남아 있다.
경은 알 수 없다. 도대체 왜 그토록 빵을 사랑하던 연이 빵을 먹지 않게 된 건지. 편식 한 번 안 하고 자란 연이 빵만큼은 먹지 않는다. 선자마을로 이사오기 전, 잠시 한 달간 연이 집으로 다시 돌아와 함께 지내던 동안에 알게 됐다. 차려서 방으로 보내주더라도 빵만 고대로 돌아 나온다는 것을. 이제 쌀밥을 매일같이 먹긴 쉽지 않으니 최소 하루에 한 번은 밥 대신 먹어야 하는데, 왜 이토록 빵 먹는 것을 거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서 독립해서 나간 뒤, 그토록 원하던 책 만드는 회사에 입사하고는 곧잘 원만히 다니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샌가부터 사회생활을 어려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대화를 할 때면 사회에 줄곧 화를 냈다. 함께 뉴스를 보다가도 갑자기 어떤 기사를 보면 불같이 큰소리를 내어 “세상이 제대로 다 미쳤어. 망할 돈미새들.” 평소 쓰지도 않던 말투에 분노가 서린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아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버리기 일쑤였다. 어떤 것 때문에 그리 화가 나는지 물어보면 휴머노이드가 문제라고 했다. 아니, 휴머노이드를 쓰는 기업도, 만든 기업도 모두 문제라고 했다.
“엄마는 휴머노이드가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급여랑 똑같이 받는 안드로이드가 입사한 거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지금 사회에 그런 일이 가득하잖아요.”
“일할 사람이 적어지는데 그 구멍을 메워주면 고마운 거 아니야? 그렇게 사람이 자는 동안, 쉬는 동안도 일하라고 나도 열심히 휴머노이드 연구하고 만드는 거잖니. 그렇게 만든 이들까지 같이 욕하면 나는 너무 서운한걸?”
연이 일하던 회사는 영세한 출판사여서 휴머노이드를 고용할 시스템도 되지 않았는데, 왜 그 일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관리하며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겐 그 일이 나를 향한 비난으로 들리게 되곤 했다.
만나서 두 시간 이상 길게 보내다 보면, 집 밖의 일로 투닥거리다가 서로 진짜로 화가 나서 막말을 던져버리고는 석의 간절한 만류에도 둘 다 감정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는거야 너. 지금껏 네가 누려온 게 어떤 돈으로 다 얻게 된 것 같니? 도대체 요새 왜 그러는 건데. 제대로 설명을 해야 나도 이해를 하지.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거야 뭐야.” 나는 놓칠세라 소리를 질렀다. 정말 나갈지 말 지, 아직 무언가 남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뒤돌아선 채 망설이고 있는 연의 등을 향해. 끝까지 내질렀다. 멀리서 저격하는 화살처럼. 연은 그렇게 다시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점점 연의 방문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가서 잘 지내고 있겠거니, 일하느라 바빠서 연락이 뜸하겠거니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믿으며 지냈다. 사실 어쩌면 내 역할을 어느 정도 다 마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몫은 이제 다 한 것이라고, 이제 내 뜻대로 되지 않게 머리가 다 커버린 딸내미의 마음은 포기하고, 내 일에 다시 더 집중하고 내 일과 삶에 집중해 보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아주 최소한의 안부 연락에도 답이 며칠씩 늦기 시작하던 연은 어느 날부터는 아예 전화도 문자도 받지도, 하지도 않기 시작했다. 걱정이 되어 가봤지만 그제야 잘 살고 있으니 돌아가시라는 문자만 올뿐이었다. 그렇게 연은 조용히 재택으로 돌려 겨우 이어가던 회사도 그만둔 채, 완전한 고립-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연의 얼굴을 볼 수 없이 시간을 보내길 3년, 연은 돌연 한마디를 적은 문자를 보냈다.
엄마. 저 선자마을,
선자마을로 이사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