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2. 빈틈

by 삶예글방



그리하여 어느 날. 영은 귀가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아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그날을 기억한다.






퇴근 후 여느 때와 같이 티빙을 틀고 웹툰 원작의 드라마를 보며 낄낄 웃고 있던 연인이 전화를 받았다. 연인은 잠시 대화를 이어 나가다,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혼자 남겨진 채 오래 웃었다. 웃기고, 감동적이고, 분노할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묘하게 낮아진 즐거움의 해상도에 결국 드라마를 중간에 껐다. 웃풍이 분다며 신문지를 덕지덕지 붙인 문 너머로 무어라 끊임없이 말하는 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에게 애원하는 것 같았다. 이번 주 주말에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알바 대타 아직 못 구했나. 생각을 이어가지 않고 곧장 폰에 집중했다. 얼마 안 되어 그가 다시 돌아왔다.


‘나 다음 주 수요일에 당근 거래하기로 했는데 혹시 대신 나가줄 수 있어?’


당근 거래를 성사하고, 둘만이 알고 있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들은 그날. 내 손으로 영에게 내 연인의 신원을 넘겨줬던 나는, 간혹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연인이 되어 무엇인가에 쫓기듯 도망쳤는데 항상 그 끝에서 마주친 거울의 내 모습은 영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깬 나를, 연인은 품에 안아주며 잘 다독였다. 연대 시위에서 체포당하기 직전, 경찰을 두들겨 패고 무작정 연고도 없는 곳으로 도망친 영. 그리고 그의 안전을 위해 신분증을 바꿔치기한 내 연인. 돈이 들어오지 않는 영의 체크카드를 가진 연인과 나는 오랫동안 위태로워진 채 생활을 이어갔다.



우리의 위태로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주 싸웠고, 매번 화해했다. 내 연인은 궁핍한 생활을 해결하고자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과외를 시작했다. 악몽을 꾸고 힘겹게 눈을 뜬 나를 돌보면서도 안드로이드의 일자리 개선 문제와 기본생활보장법 연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시기의 나는 무척 불안하면서도 대체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알지 못했다.

내 연인은 나를 무척 사랑했다. 조금이라도 예민한 기색을 보이면 그는 곧장 사랑한다는 말로 나를 감쌌다. 그는 나와의 데이트 끝에 항상 연대 시위에 참석하길 바랐고, 나는 그가 그 속에서 혹시라도 영을 찾기라도 하거나 영과 같은 안드로이드를 만날까 두려웠다. 자꾸 시위에 집중하지 못하고 얼른 집에 돌아가자며 보챈 것 때문에 연인은 점차 나에게 시위에 가자며 권유하는 횟수를 줄였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안드로이드 보호 운동을 곧잘 참여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세 번 데이트했다. 집에 돌아오면 살을 맞대고, 입을 맞췄다. 나 또한 친구들을 만나고, 일을 하며 일상을 영위했다. 그럼에도 가슴속에 밀려드는 이상한 고립감을 무시할 수 없어, 자꾸 그에게 영의 안부를 물었다. 듣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은 내 연인의 부고로 인해 멈췄다.



그 무렵, 내 연인은 안드로이드 신분증으로 생활이 제한된 상태였다. 매달 갚을 수 있었던 신용카드 거래대금은 빚으로 돌아왔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위가 쓰리다며 자주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내가 대신 약을 받아오는 일이 잦았다. 안드로이드 연대 시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sns에 올렸다가, 동네 아이의 학부모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바람에 과외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학부모에게 항의했으나 돌아오는 건 경멸 또는 조롱이었다. 과외 학생들까지 그를 마주칠 때면 기피하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고개는 더 빳빳하게 세워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종종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무언가를 꽉 쥐며 감정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활발하게 연대하고 활동하던 동아리와 매체가 연이어 활동을 종료했다.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운영이 불가할 것 같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상 동참하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신입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나는 더 좋은 걸 먹이고, 더 좋은 곳에 데려가고자 업무량을 늘렸다. 그달의 생활비를 충당하려 추가 업무를 강행하고 있을 때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 연대 시위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가 휘말렸다고. 앞장서서 폭력을 저지하던 그와 몇몇 사람들이 사고를 당했다고. 위독한 상태이니 확인한 직후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3일장이 끝난 후 나는 미친 듯이 집을 뒤졌다. 모든 것을 다 끄집어냈다. 연인의 물건을 모두 정리하니 세 박스가 나왔다. 너무 부족했다. 한 사람의 흔적이 고작 이것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뭘 찾아야 하는 줄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연인의 뒤꽁무니를 찾아 헤맸다. 연인을 생각하는 시간에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다. 매일 도망치면서도 도망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청소기 속에 빨려 들어간 적갈색 머리카락까지 분류해 랩으로 싸놓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찾아낼 게 없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우리가 했던 모든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허공을 짚으며 말을 걸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손을 씻고 그릇이 두 개 놓인 상을 차렸다. 내가 잠에 들면 종종 노트북을 켜던 게 생각이 나, 때론 연인인 척 굴기도 했다. 매일 그가 쓴 글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다 보면 그게 내 문장인지, 그의 생각인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none’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알 수 없는 파일을 발견했다. 그가 사용하던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 나는, 전문가에게 파일 분석을 요청했다. 몇 달 후, 분석을 마친 그 파일이 매우 독특하다는 대답과 함께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로 정리된 추가 파일을 전달받았다. 그 파일은 인공지능 로봇에게 데이터베이스 기반 기억을 주입하기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파일이었는데, 그 속에는 내 연인의 모든 생애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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