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 님, 어느새 춘분春分이 지났네요. 봄의 하늘이 오래도록 내리쬐어주는 햇살을 잘 만끽하며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주말에 날씨를 따라 길어지는 해의 신호에 맞춰 식물들과 함께 보냈어요. 지난 주에 파주 식물농장에 가서 새로운 식물 친구들을 데려왔거든요.
그래서 일요일 낮, 시원님의 시선집에 깜짝 배송되었던 편지에서 안부를 물어주셨듯, '어떤 것으로 채우고 있나요' 묻는 질문에 돌아보면요. 한껏 따스해진 햇살과 푸른 식물로 채운 하루를 살아낸 것 같아요. 식물들에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해주는 날로 정했거든요. 낮부터 해질무렵까지 햇살을 담뿍 머금으며 집 앞 화단에서 남자친구랑 둘이 같이 식물들의 새 집을 만들어주고, 오랜 흙도 건강하고 양분 있는 흙으로 바꾸어주고, 또 뿌리가 가득 차게 커버린 식물의 집을 바꾸어주기도 하면서 보냈어요.
편지를 쓰던 저녁엔 갑작스레 심해진 생리통에 배를 감싸안고 편지도 못쓰고 잠들어버렸지만요. 그래도 낮에 가득 받아둔 햇살 덕분인지 푸욱 깊은 잠에 빠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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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엔 월요일마다 하고 있는 일본어 수업을 들으면서 동사 하나의 쓰임에 대해 잠시 배우게 되었는데요. 그 하나의 동사 덕분에 긴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가다' 라는 뜻의 카에루(帰る)라는 동사였는데요. '가다'라는 뜻을 일본어에서 두 가지의 동사로 쓸 수 있더군요. 혹시 일본어를 배우신 적 있다면 아시겠지만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범용 동사는 이쿠(行く)라는 동사거든요. 신기한 점은 두 개의 동사를 아무 상황에나 마음대로 쓸 수 없고, 가려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쓸 수 있는 동사가 나뉜다는 거였어요.
카에루(帰る) 라는 동사를 언제 쓰냐하면, 보통 외출 했다 집에 돌아갈 때 쓴대요. 집에 가는 것 뿐 아니라도 다른 동네로 떠났다가 내가 사는 동네로 돌아갈 때, 타국으로 갔다가 내가 살던 나라로 돌아갈 때, 그러니까 내가 소속된 곳, 내가 거할 곳 '나'의 장소로 돌아갈 때에만 쓸 수 있는 동사이고요.
그 외에 어디든 향해 갈 때, 보통 '학교에 간다.', '직장에 간다.', '도서관에 간다.', '운동하러 간다.' 모두 이쿠(行く)를 쓰고요. 친구네 집이나 선생님의 집, 동료의 집에 갈 때에도 모두 이쿠(行く)를 쓸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집에 갈 때엔 이쿠(行く)를 쓰면 안된다는 거예요. 나의 집 - 나의 동네 - 내가 속한 곳에 갈 때에는 카에루(帰る)를 써야 하는 거죠.
참으로 이 지점에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어떡하나?
돌아갈 나라가 없어진 사람은 어떡하지?
집이나 나라의 터전을 잃은 사람은
돌아가다- 라는 문장을 배워도 쓸 일이 없어지는 것인가?
세계에서 여전히 자연재해나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의 파괴 때문에, 혹은 경제 위기로 인한 국가 부도나 전쟁 때문에 살던 집과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겐 일본식 표현으로 '집에 가다 - 우치니 카에루(家(うち)に帰(かえ)る)' 라는 문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거구나. 싶어서 황망한 생각이 들었어요. 집을 잃는 것이, 내 소속된 터를 잃는다는 것이 - 관련된 언어도 잃는 것이라는 걸 슬프게 깨닫게 되었죠.
내가 자연스레 사용하는 언어가, 어느날 갑자기 사용할 수 없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혹은 배워봤자 쓸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세계에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하나씩 쿵-소리를 내며 가슴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어요. 알고 있었지만 실감하기 어려웠던 사실이 갑작스레 살갗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수업시간의 후반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답니다.
누구에게나 언어를 잃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것의 상실엔 그 상실한 존재나 대상에 관련된 언어도 함께 상실하는 것이겠죠. 당연한 이치일텐데 왜 오늘은 그리도 무겁게 다가왔을까요. 어쩌면 버젓이 집이나 나라가 있어도, 나의 장소. 내가 쉴 곳, 나의 터- 라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물리적인 집과 터전도 중요하지만 - 마음으로 돌아갈 집 같은 곳, 고향과 같은 사람이나 공동체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내게 집과 같은 쉼이 되어주는 사람들,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그런 존재들이 있어 제가 마음도 몸도 양분을 가득 채우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시원 님도 제게 포근한 쉼터 같은 글을 매 주 선물해주는 고마운 친구셔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카에루' 할 곳이 아직은 많이 있는 것 같네요. 제가 받은 것처럼, 저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기분을 느끼는 사람에게, 내 집, 내 돌아갈 곳으로 느껴지게 하는 고향같은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집과 같은 쉼을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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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위어도우에서 일하다가 잠시 손님이 없는 시간에, 가볍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앞으로 3~4년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중장기적인 목표나 바람이 있는지' 대화 해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직주일치의 형태로 각자의 일하며 서로를 돌보기도 하면서, 느슨하게 모여 사는 작은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보고 싶은 소망을 꺼내보았어요.위선자의 마을처럼 섬 하나를 통째로 꾸리진 못하겠지만? 건물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재밌는 상상과 조사를 거듭하는 날들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의 날들.
사회와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며 잠기는 무거운 생각도, 막연한 기쁜 상상도 같은 양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지내보면 좋겠어요.
시원 님께서도
밤도 낮도 소중하게 충분히 누리는 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나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