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9. 성심

by 삶예글방


뜻한 대로 명성을 얻은 영은 근래 퇴근이 늦었다. 안해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모임이나 새로 알게 된 이들과 어울리고, 먹고 마시지 못해도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무리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고도 했다. 영의 스케줄이나 동선을 알게 된 건 집에 들어온 그가 잠들기 직전, 소등하고 조곤조곤 말해준 덕분이었다. 영은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떨어진 배터리를 채우기 위해 하루 동안 소회를 밝힌 직후 충전 모드-잠들기-로 돌입했다. 영의 일과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던 내가 할 말을 갈무리하는 사이 대화는 끊겼다. 혼자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영이 말해준 그의 하루를 곱씹었다. 영의 몸짓과 말투까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다가도 제풀에 지쳐 잠들었다. 실은 그의 일과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으면서도, 더는 내게 말하지 말라고 단언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밤이 거듭될수록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의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신발을 적신 빗물로 발이 꽁꽁 얼어 오한이 드는 날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 신발장 앞에서 빗물에 젖은 점퍼를 털었다. 접힌 우산의 머리 꼭대기가 바닥에 작은 연못을 만들도록 신발장에 비스듬히 세웠다.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드러난 맨살을 마구 문질렀다. 손과 발을 씻는 동안 빨개진 코끝과 충혈된 눈을 관찰했다. 이젠 며칠 밤을 뒤척이면 곧장 얼굴로 드러나는구나. 거울을 보며 뺨과 턱 부근의 살을 손으로 밀어 올렸다. 툭하고 떨어지는 피부. 내려간 입꼬리, 아무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아 자신도 지겨운 듯 멍한 눈. 반면 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코올 스와프에 따라 주기적으로 닦아주어 먼지 한 톨 끼지 않은 매끈한 피부. 만약 그 뺨을 꼬집으면 어떨까. 그의 뺨이 비틀리고,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내 손을 쳐내는 영을 상상하며 화장실을 나섰다.

'하지 마'라고 할까? '그만해'라고 할까. 짓궂은 장난에 원은 '왜 그래'라고 답했다. 영은? 똑같이 대답한다면 영은 그 표정도 지으려나.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나는 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상상의 재료가 부족했다. 영이 지을 표정이 어떤 표정이지. 되레 내가 얼굴을 구겼다. 떠올리고 싶어도 마음에 잡히는 형상이 없었다. 어떡하지. 원이 내게 인상을 찌푸렸던 순간이 언제였지. 우리는 골목길 아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2,500원인 카페에서 말싸움하곤 했는데. 나는 곧장 화장실 불을 끄고 다시 점퍼를 입었다.


다행히도 카페는 아직 영업 중이었다. 지갑 하나 들고 나온 나는, 창가 자리를 좋아했던 원을 떠올리며 우리가 자주 앉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우리가 이곳에서 처음 살게 되었을 때, 십 년 후를 상상해 보라며, 우리는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여름에도 유자차를 마시고 있지 않겠냐고 했다. 원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길 좋아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땐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도 옆자리를 더듬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림을 그리는 원의 손이 화면 위에서 바삐 움직일 때, 모노톤의 일러스트를 자주 그렸던 그의 펜 끝에서 회백색 생명이 탄생하고 있을 때,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집중한 원의 옆모습은 짐짓 화가 나 보였다. 나는 찌푸린 미간을 보고 이따금 그의 손등을 손톱 끝으로 두드렸다. 그럼 어김없이 원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찻잔에 고인 노랗고 투명한 유자차의 수면에 원과 나의 기억을 뽑아내 실처럼 늘어뜨리고 싶었다. 동시에 창자가 뜨거운 찻잔으로 끌려간 듯 홧홧했다. 십 년 후의 원과 나를 상상해 보라던 과제는 끝끝내 제출하지 못했다. 내가 제출하기 전에 답을 알아버린 탓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여지없는 공백은 구덩이가 되었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게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원이 없는 현실을 이제껏 무의식 중에 무서워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그가 원망스러웠다.


왜 너는 너의 정체성을 남에게 줄 생각을 했던 건데?

신분과 이름도 모자라, 나 몰래 기억을 백업한 이유는 뭔데?

그리고 어떻게 도망쳤던 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데.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미칠 것 같았다. 급하게 카운터에서 종이 한 장과 볼펜을 빌렸다.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 펜을 쥐었다. 빈 종이 위에서 펜 끝이 떨렸다. 무얼 먼저 물어야 할까? 내가 답을 찾아야 하는 게 있다면 그건 뭐가 우선이 되어야 할까? 원이 신분을 빌려준 이유, 기억을 백업한 이유, 그 사실을 영에게만 알린 것. 두서없이 글씨를 휘갈겼다. 종이 위엔 '원', '이유'라는 글자가 빼곡했다. 쓰면 쓸수록 뜰 수 없는 물을 긷는 심정으로 나는 종이 한 장에 매달렸다. 함께하는 미래의 형태를 그려보라고 답을 종용해 놓곤 도로 답지를 빼앗아버린 그. 나도 모르게 억누른 신음이 흘렀다. 야속해. 야속하다. 원의 얼굴을 그렸다가, 도로 그 위로 잔뜩 엑스 표시를 쳤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다. 처음으로 원이 미웠다. 지운 원의 얼굴 옆으로 영을 그렸다. 둘은 다르게 생겨도 머리칼이나 입은 옷은 같았다. 둘은 달랐지만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둘의 아래로 내 뒷모습을 그렸다. 흡사 나란히 선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원과 영의 그림에 걸쳐 동그라미를 그렸다. 부아가 치밀었다. 눈물이 흐르는 걸 닦지도 않았다. 외로움에 스스로 상처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열심히 아프길 택했다. 둘 사이에 화살표를 그리고, 원의 몸도 영과 똑같은 형태로 그렸다. 둘 다 자주 입는 바지, 한동안 없어진 줄 알고 찾아 헤맸는데 실은 수배 기간 동안 영이 입고 있었던 연분홍 니트. 목 부근이 늘어나 보온의 기능을 상실한 목폴라. 인물 사이에 내가 아는 그들의 공통점을 나열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얼굴 근육이 움직여 고여있던 눈물이 마저 흘렀다. 고개를 들었다. 이미 카페 밖은 어두웠다. 식은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구를 닦던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돌아보며 가볍게 목례했다. 몸을 움직이라고 명령을 받은 안드로이드처럼 무작정 걸었다. 언덕은 오르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바깥바람을 쐬고 나니 종이에 적었던 수많은 질문 중 하나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원의 마지막이 된 그 전날,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을 돌리고 누운 채였고 나는 그런 원의 목덜미를 살펴보다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깬 채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물끄러미 보던 벽지의 무늬를 떠올리자 그때의 내가 무슨 심정으로 원을 등지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물어볼 수가 없어서, 내가 묻기만 하면 얼마든지 답할 준비가 된 원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수없이 많은 날을 모른 채 지나갔던 나. 식물의 이파리 같은 무늬가 빼곡한 벽지를 보며 나는 그 위에 말하지 않을 생각을 새겼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었다.


인생의 일부를 넘겨주는 일을 결정하는 데 나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았던 건지.

네 정신을 그대로 옮겨 담는 짓을 한 이유는 뭔지.

너의 죽음이 그 행동과 연결 지점이 있는지.

너의 이름, 기억, 혼과 살을 물려주는 그 행위에,

실은 마음속에 나와 함께 영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영의 자리란 어느 쯤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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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