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10. 양태

by 삶예글방

끝없이 걷다 보면 생각이라도 갈무리될 거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고요한 야외는 상상의 저변을 넓힐 뿐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해갈하지 못한 채로 골목길을 올랐다. 천국의 계단이라며 원과 놀렸던 그곳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나는 영이 지금 집 안에 있을지, 나를 기다릴지, 자는 척을 할지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당장 영을 등지고 짐을 싸서 나오고 싶었고, 이불속에 누워 충전하는 중이라면 말없이 나도 그 옆에 누워 잠에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한 뼘 정도 떨어진 채 등지고 누워, 막 숨을 고르던 찰나 영이 입을 열었을 때 놀란 마음에 몸을 떨었다. 어디 갔다 왔어. 전류가 웅웅 흐르는 방 안에서 영이 평온하게 물었다. 나는 침묵했다. 우리 이야기를 좀 할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랑 말할 생각이 없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응, 아니, 두 대답을 동시에 떠올리며 어떻게 한 문장으로 조합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를 어둠 속에 둔 채로 잠에 빠졌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영을 피했다. 시작은 식사 거부였다. 영이 끓인 순두부 라면이나 된장국을 먹을 수 없었다. 그 레시피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오로지 원의 기억 덕분이었고, 라면 속에 든 순두부, 된장국 속에 떠다니는 애호박을 보며 영을 향한 증오와 원에게 품은 애정인지 아님 그 반대를 느껴야 하는지 제대로 된 답을 알 수가 없어 그 감정의 혼탕 같은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녁엔 추가 근무를 강행하거나 의미 없는 산책을 지속했고, 아침에는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일찍 출근했다. 일주일 넘게 그런 생활이 지속되자 이후엔 몸이 피곤한 탓에 퇴근하자마자 바로 잠을 청했다. 그럼에도 영은 포기하지 않고 밥상을 차렸다. 영이 펼친 반상을 접는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날 위해 이불을 펴두고, 방을 청소하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손길이 틀렸다고 증명이라도 할 것처럼 어긋나게 행동했다. 영이 펴둔 이불 밖에서 웅크렸고, 아침이 되면 보란 듯이 집을 어질렀으며 단 한 번도 대꾸하지 않았다. 영이 붙잡고 말을 걸어도 내가 한숨을 지으면 그는 금세 대화의 의지를 포기했다. 나는 그렇게 도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피곤함에 절은 얼굴로 화장실에서 양치하던 중 코피가 쏟아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를 급하게 뜯어 콧구멍에 쑤셔 넣고 대충 양치를 마무리했다. 다행히도 세수를 마친 참이라 휴지를 빼지 않아도 되었다. 볼일까지 보고 나온 후 옷을 입으려는데 옷장 앞에서 눈이 핑 돌았다. 휘청이며 옷장 문을 잡았다. 발을 헛디뎌 책더미를 차는 바람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설거지하던 영이 돌아봤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짚는 새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한아. 너 왜 그래?”


내 팔을 붙드는 영의 손을 거부했다.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휘젓는데, 그가 다시 나를 거세게 잡았다.


“너 지금 피 나.”

“나도 알아.”

“피난다고. 흐르잖아.”


영이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붙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차가운 감촉에 몸을 떨다, 그의 엄지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 당황했다. 나도 손으로 턱께를 쓸었다. 그제야 뜨끈한 온도가 느껴지며, 코에서 흐르는 피가 턱을 타고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내가 넋 나간 소리를 내자 영이 억지로 내 허리를 굽혔다. 동시에 옷장 문을 열어젖히고 외투를 꺼내 내게 입혔다.


“출근하지 마. 병원 가자. 너 상태가 안 좋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영의 마지막 말에 다시 한번 반항하려던 내가 멈칫했다. 원망 섞인 채 격앙된 목소리.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말투였다. 영은 대충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를 업었다. 나를 압도하는 힘을 쓰는 영에게 속수무책으로 실려 가며, 나는 그의 손수건에 코를 박고 한쪽으로만 숨을 쉬는 데 집중했다. 그의 맨투맨까지 피로 젖어가는 걸 보며 현기증으로 인한 구역질을 견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했다. 접수처에선 내 옷의 소매와 영의 등까지 적신 코피를 보고 심상찮음을 직감했는지 복잡한 안내 절차 없이 곧바로 나를 들여보냈다. 간호사는 응급실 베드에 나를 앉히고, 동반인인 영을 응급실 문 앞에서 가로막았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말에 영은 안드로이드용 신분증을 꺼냈고, 간호사는 안드로이드 보호자는 추가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나를 다른 간호사에게 인계했다. 두 명 정도가 더 다가와 여태껏 코를 막고 피를 흘리는 내게 상태를 물으며 베드를 이동했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동으로 닫히는 응급실 문 너머 나를 살피려고 까치발을 드는 영을 응시했다. 출혈이 많아 어지러운 와중에도 훤칠한 장신이 기웃거리는 모습은 선명했다.


“같이 오신 분은 보호자 분 맞으세요?”


어린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내 팔에 혈압측정기를 감았다. 다른 한 명은 기절하지 않도록 내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베개를 받쳐주었다.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기도 했다. 팔을 조이는 압력이 거세졌다. 간호사가 재차 물었다. 영이 내 보호자가 맞느냐고. 현기증을 참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귀가한 건 그로부터 5시간 뒤였다. 스트레스와 피로가 극심해 자율신경계가 과민해지며 코의 점막이 건조하고 약해졌다고 했다. 보통 겨울철에 자주 발생하는 일이긴 하나, 출혈의 양이 워낙 많았고, 동일한 증상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서 혈소판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간이나 신장 질환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응급실에서 온갖 검사를 진행했다. 다행히도 수혈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서 수액을 맞으며 까무룩 잠에 들었다.


중천에 뜬 해를 보며 집에 온 게 얼마 만인지. 응급실 앞에 영은 없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이 없어, 연락할 수도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에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고 집 앞까지 왔으나, 결국 계단을 오르는 건 내 몫이었다. 꼭대기, 산과 천국의 바로 아래 우리 집. 한바탕 잠을 푹 자서 그런지 평소와 비슷했다. 찬 공기가 콧속으로 들이칠 때마다 은은하게 피비린내가 났다. 소매가 피로 푹 젖은 탓에 보기 흉한 꼴이라 얼른 집에 들어가 씻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자, 뜨끈한 집의 공기가 훅 끼쳤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출근은 글렀겠지. 그냥 집에서 자던지 공원으로 산책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이 나자, 그도 돌아봤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황한 것처럼 왔냐고 물으며, 영은 재빠르게 그것을 도로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먼저 달려들어 그가 박스 뚜껑을 덮기 전에 손에서 물건을 낚아챘다. 두꺼운 공책이었다. 펼쳐보자 4년 전의 날짜와 함께 원의 필체가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페이지가 보였다. 영이 보고 있었던 건 원의 일기장이었다.

“괜찮아? 병원에서는 뭐래?”


고개를 돌리자, 이미 많은 것을 훔쳐본 듯 몇 년 치 원의 일기장이 바닥에 쌓여있었다. 201x 년, 202x 년. 그의 유품을 미친 듯이 품에 끌어모을 때 구분하기 쉽도록 내가 겉면에 써둔 숫자가 일기장 표지에 가득했다. 영이 보고 있던 일기장은 원이 죽기 전 해의 것이었다. 영은 오로지 나에게만 관심이 팔린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췄다. 아직도 안색이 창백해, 너 좀 자야겠다. 여기 누울래? 영이 바닥에 앉아 한 팔로 원의 일기장을 밀쳤다.

그 순간 나는 가슴팍에서 무언가 폭발했다고 느꼈다. 양손으로 힘껏 영의 어깨를 밀쳤다. 그가 뒤로 나자빠지는 사이 나는 원의 일기장을 주웠다. 그는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일기장을 안은 채 뒷걸음질 쳤다. 건드리지 마. 스스로 놀랄 정도로 단호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네가 왜 봐? 잠깐의 침묵 후 한 번 더 영을 쏘아붙였다. 영은 넘어진 상태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태도에 나는 한 번 더 내 몸이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것까지 봐서 뭐 하게. 일기장까지 보면 뭐가 달라져? 그 새 기억이라도 잃어버렸어? 네가 원의 기억을 모조리 저장하겠다며. 네 몸에 기억을 다 심어달라며. 그래서 내가 너한테 다 줘버렸잖아. 원의 기억이고 뭐고, 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들 다 모아서 너한테 심어버렸는데. 뭐가 더 필요해서 이젠 내가 추억하려고 모아놓은 것까지 들춰보는 거야? 내가 병원에서 자는 동안 너는 여기 와서 기억이나 도둑질하고 있었어? 아니면 출근하기 전에 궁금했던 거야? 원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공부해서 걔가 했던 말까지 다 네가 생각해 낸 것처럼 굴려고?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고 대체 누가 말해줬어. 원이 그래도 된다고 해? 네 기억 속에 있는 원이 그래도 된다고 말이라도 해준 거냐고.


영은 침묵했다.


나는 몸을 떨었고, 그러자 품에 안긴 원의 언어도 중심을 일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속에 든 단어 하나라도 잃어버릴 것 같아 온몸에 힘을 줬다. 그럴수록 몸의 떨림은 거셌다.


영은 여전히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보며 한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몸을 추스르고 박스를 닫았다. 선반 아래 다시 그걸 밀어 넣고, 일어나서 나를 똑바로 마주 봤다. 영은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걸 반복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나와 눈을 맞췄다가 도로 먼 곳으로 시선을 피하던 영이 어렵게 한 마디를 꺼냈다.


네가 이 정도로 아픈 적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어. 도저히 기억나는 게 없는데, 혹시나 나한테 오류가 있어서 모르는 걸까 봐, 답답해서 미칠 것 같길래.


원이가 없으면 내가 너를 챙겨줄 수 있기는 하니. 그 애가 아니면 난 너를 알 수가 없는데.

그리고 영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쏟은 말과 끌어안은 글자 사이에서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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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