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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Sep 15. 2021

[소설] 이십대 여자, 기자 (5)

연재소설 제 5화

#5


- 한 기자님. 혹시 오늘 퇴근하시고 일정 있으신가요? 

- 왜 그러시죠?

- 일정 조정이 가능해서요. 오늘 시간 되시면 오늘 뵐 수 있을까요?     


정변이 오늘 보자고 약속을 조정한다. 여기서 유연하지 않게 본 일정대로 만난다면 분위기가 더 낯설 것이다. 그렇다고 덥석 ‘나 오늘도 한가해요’ 식으로 유연한 예스맨이 되는 건 곤란하다. 오늘 만나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답을 피하자.     


- 잠시만요.     


이대로 답장을 잠정 보류한 채로 일하자. 그리고 한 5시 못 돼서 연락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내가 답장하기 전에 먼저 문자 올 확률도 꽤 높다.          


고담시청 기자실에서 인사하다 보니 11시가 넘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황 국장이 같이 식사하잔다. 다른 기자들을 포함해 4명이서 식당을 갔다. 둘 다 황 국장에게 선후배 정도지만 나와는 인사하는 정도로 가깝거나 편하지 않은 기자들이다.      


“석진이랑은 식사가 처음이 아니지?” 황 국장이 말한다. 전에 이석진 기자와 셋이서 점심을 한 적이 있다. “국장님. 한 기자랑 제일 자주 보는 사람이 저일걸요?” 이 기자는 황 국장의 말의 의도를 빨리 파악한다. 둘은 전에 꽤 친했던 사이로 보인다. 나도 “이 기자님이랑은 교육청 가면 매번 보는데요. 정말 자주 보죠.”라고 대답했다.     


“그래? 나보다 더 자주 본단 말이야?” 황 국장이 말하자, 이 기자가 “한 기자 일 시작하는 처음부터 쭉 봤어요. 출입처가 겹치니까.”라고 답한다. 자리에 함께한 심한규 부장이 끼어들면서 말한다. “자주 보이는 사람이 진짜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둘 다 열심히 뛰고 있나 보네요.” 심 부장은 가끔 고담시청에서만 봤는데 인상부터 진지하고 교양이 풍긴다.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은 없지만, 말투도 교양 있어서 이미지가 좋다.      


“심 부장님도 시청에서 자주 뵀는데, 이렇게 식사 같이하는 건 처음이네요. 오늘 황 국장님 덕분에 같이 식사도 하고 좋네요.” 내가 심 부장과 황 국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다들 반가운 인사말을 나누면서 낯선 분위기가 물리고 밥을 떴다.     


“원 시장 재임할 거 같아요?” 이 기자가 화제를 열었다. “당연히 또 나오겠지. 지금은 평타 치는데 반전만 있어도 재임 못할 거 같아.” 황 국장이 받아쳤다. “반전이 있을까요? 그래도 고담시장 정도면 인지도가 높잖아요.” 이 기자가 별거 있겠냐는 투로 말한다. “그러니까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나는 원 시장이 재임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3선이니까 질린다.” 황 국장이 고소한 말투로 속내를 비춘다. 거기에 심 부장이 “그럭저럭 잘해왔지요.”라고 군더더기를 빼고 말한다. “잘한 정책이야 많지요. 못한 것도 많고요. 문제는 3선 재임이면 정당도 무시하고 독보적으로 힘쓸 거 아닙니까.” 황 국장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도 당 눈치 봅니까? 독보적이에요.” 이 기자가 황 국장 의견에 덧붙인다.     


“스포츠로 내수 경제 신경 쓴 게 시민들에게는 크게 다가가지 않을까요?” 내가 끼어들었다. “네가 잘 모르는구나. 스포츠는 원 시장보다 전 시장이 더 신경 썼어. 전 시장은 스포츠 매니아였지.” 황 국장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래도 대외적인 사업은 원 시장이 다 성공시켰잖아요. 제가 아는 프로 선수도 다 원 시장 덕에 고담시에서 대우가 좋아졌다고만 생각하는 데요. 경기장 인근 상권이 실질적으로 활성화되진 못했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야 아직 평가하기 이르니까요.” 내가 황 국장 말투에 영향받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긴, 이번에 스포츠로 고담시 이미지 메이킹도 잘 됐지.” 황 국장이 말하고 끝이 나기 무섭게 바로 “어쨌든 사업은 마케팅이 중요한데, 마케팅이 운이 좋게 잘 됐어요.”라고 대답했다. 황 국장은 “지자체 사업도 사업인데 운 좋았지. 이번에 대결 구도로 내용이 짜여서 언론에서도 재미있게 떠들어 줬잖아.” 황 국장은 겸손해 보이지만 여느 나이든 기자들처럼 자기 말이 참신한 양, 혹은 참신한 내용을 아는 양 말하곤 한다. 나는 그게 그런 말투가 둘이 대화할 때는 호응이 되지만, 여럿이 있을 땐 분위기를 흐리는 데 몫을 하는 것 같아서 별로다.      

“에이, 골치 아픈 주제 말고 시원한 이야기거리 없나? 요즘 칼럼기사 쓸 게 없어.” 황 국장이 화제를 돌린다.      

시계를 보니 4시가 다 돼간다. 정변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      


- 연락이 늦었죠. 저도 오늘 시간 낼 수 있어요.          


답장이 왔다. 회식이나 지루한 술자리도 아니고, 새로운 약속이 잡히니 오후가 즐겁다. 요즘 일상이 틀에 박혀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주말에 겨우 만나는 사람은 남친밖에 없는데 그마저 노트북 들고 일하며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다.     


- 니나야. 오늘 저녁 어때?

- 오늘은 일정 있어용

- 에구.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정이야? 남자야? 히히

- 그냥 저녁 먹기로 저번에 잡아 놓은 일정이라. 담에 저녁에 커피까지 마셔요. ^^

- 그래.     


홍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홍 선배도 좋은 대화 상대인데. 만나면 즐거운데 요즘 좀 둘만의 티타임이 뜸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약속을 잡지 않다 보니 상대가 적극적이지 않으면 안 만나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오히려 거절하는 날이 대부분이니,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고 만나도 간단한 점심시간대 티타임으로 끝난다.     


- 저 극장 앞에서 갈색 코드 입고 있어요. 차량은 길가에서 비상깜박이 켜주세요.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니 각자 알아보기 편하도록 문자를 보냈다.     

 

어떤 세단이 멈춰 비상깜박이를 켜고 서 있다. 조수석 창을 열어 소리친다. 나를 향한 거 같아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이다. 문을 열고 승차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SUV 차량이었는데. 오늘 다른 차네요.”

“네 저번 차는 출퇴근용이고요. 이 차는 여가용. 제가 딱히 취미가 없어서 차에 욕심을 내요.”     


신경 쓰고 나온 게 분명하다. 애써 차량을 바꿔 타고 나온 것 아닌가. 재산이 많은지, 재테크를 잘하는지, 지나치게 차에만 돈을 투자하는 건지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 이유에 해당한다면 비호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외제차, 깔끔한 옷차림, 옷과 어울리는 시계 등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두 대 이상의 차를 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생색내는 게 아니라 욕심이라고 표현했으니까 호감을 기대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음식 어때요?”

“좋아해요. 근데 오늘은 삼겹살 어때요?”

“그럼, 원하시는 삼겹살 먹으러 가죠.”     


삼겹살 2인분과 소주를 시켰다. “운전하시니까 안 드셔도 돼요. 저는 간단하게 반주로 먹고 싶어서요.” 술 마시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는지 그냥 고기만 먹기는 섭섭하다. 대개 일과 관련된 사람들과 식사하면 점심때도 반주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리운전하면 돼요. 소주잔 부딪히는 맛도 있으니 같이 마셔요.” 술도 주문하겠다고 하자 불편한 내색 없어서 같이 마실 줄 알았다.      


“성함이 박선우 씨죠? 선우라는 이름 좋아요.” 찬찬히 신상을 알아가면서 술이 들어가면 첫 식사지만 분위기가 자연스러워 친근함을 느끼기 좋을 거다.     


“네. 제 이름이 왜 좋아요? 저보단 한니나 씨 이름이 독특하고 예쁜데요? 한자 이름은 아니죠?” 언제나 첫 화제는 내 이름이다. 쉽게 외우기 좋고 이름에 대한 내용도 있어서 간단한 소잿거리가 된다.      


“한글 이름이에요. ‘너와 나’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뜻도 좋네요. 부모님이 굉장히 마음 깊은 분들이실 것 같아요.”

“네. 외롭지 않은 이름이죠? 선우라는 이름은 그냥 이미지가 반듯하고 선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어릴 때 남아를 낳으면 선우라는 이름을 지을까 생각했었거든요.” 

“정말요? 저는 다소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해주시니 제 이름도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아니, 니나 씨가 워낙 섬세한 분이셔서 그렇겠죠?”     


내 이름은 소재가 되고 말이 길게 이어질 수 있는 좋은 장점이다. 상대의 이름까지 소재로 만들고 뜻깊다고 표현하는 것도 상대에게 좋은 느낌을 준다. 스타트가 좋다.     


삼겹살 1인분을 추가로 먹고 소주 한 병을 비웠다. 헤어지기는 아쉽고, 술자리로 옮기는 부담스러웠지만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권하는데 거절하고 싶지 않아 맥주 바에 갔다. 박선우 씨는 세 명이 영업하는 법무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은 법원 근처고 선비동 근처에서 혼자 산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유학 시절 이야기를 조금했다. 좋은 추억도 많지만,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많이 공부해야 해서 청춘을 대부분 공부로 보냈다고 했다.      

“사실 오늘 일정이 있었는데 취소하고 니나 씨 만나러 온 거예요. 니나 씨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흔한 얼굴도 아니고요. 미국이나 유로권 가면 아마 엄청 인기 많을 거예요. 지난번에 보니 차분하고 매너 있으셔서 그것도 좋았고요. 물론 오늘은 커피값 보상하려고 온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기분이 좋다. 그런데 ‘오늘 같이 자자고 하는 건가?’ 내일 하루 종일 취재 다녀야 하니까 좋은 타이밍은 아니다. 오늘 더 무리하면 내일 얼마나 끔찍한 컨디션일지 안 봐도 뻔하다. 근데 지금 분위기는 좋다. 선우 씨는 매우 잘생기진 않았지만 이름처럼 외모도 멀끔하다. 말하는 것도 재수 없거나 거만하지 않다. 우선 이대로 분위기를 타자. 그리고 내일 스케줄을 넌지시 던지며 헤어지자.     

 

“남자친구 있어요?” 박선우가 물었다. 나는 항상 하는 대답이 있다. “많이 있어요.” 그럼 이런 대답이 보통 나온다. “그냥 친구 말고요. 애인이요.” 역시나. 여기서 만약 ‘남자친구가 있단 건지, 없단 건지’ 묻거나, ‘잘 되가는 상대가 있느냐’ 농담조로 ‘어장관리녀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나의 모호한 대답에 불만을 표현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감출 줄 알아야 나도 편안하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다.     


“정말인데? 만나는 남자 많아요.”라고 대답했더니 박선우는 미간이 살짝 꿈틀거리면서 어깨를 뒤로 저치는 모습을 보인다.      


“자유연애주의인가요? 흥미롭네요. 이렇게 솔직한 분은 한국에서 처음 만나 봐요.” 침묵이라고 하기엔 짧은 1,2초가 지나고 주름진 표정이 펴지면서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돈다. 그리고 연이은 질문이 쏟아진다. 이제 약간 보통 한국남자 같다. 성적인 질문만 쏟아지고, 노골적이고 수위 높은 성적 대화가 가능한 게 신이 난 모양이다. 나는 모든 걸 오픈하진 않았고, 여지를 남기며 잘 양념을 버무려 말했다. 과장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참외에 고추장과 젓갈 등 양념을 버무리고 맛보면 참외인지 오이인지 헷갈린다. 덜 아삭한 오이인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참외무침을 겪어본 적 없으니 참외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어차피 내 이야기를 신랄하게 해봤자 참외무침을 먹어보지 않은 이가 이해할 능력은 없다. 그냥 오이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하는 게 상대가 이해하기 적절하다.      


“그런데 하룻밤이나 단편적인 만남을 선호하진 않아요. 클럽에 놀러가거나 쉬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황도 거의 없고요. 요즘은 일에 빠져 지내거든요.” 지나친 판단에 들어서기 전에 선을 그어줘야 한다.     


“그럼 여러 남자를 어떻게 만났어요? 다 일하면서 만난 건가요?” 질문에서 약한 의심이 느껴진다. “우연이 겹치고, 타이밍이 맞아서 만남이 되는 거죠. 만남, 인연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상세한 내용을 말할 필요도 치우치는 느낌을 줄 필요도 없다. 이 정도로 우회하면 적당히 상대도 물러서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이 만남도 우연히 마주치고 타이밍이 맞은 거 맞나요?”라고 말하는 박선우의 머릿속은 ‘나랑 잘 수 있나요?’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고민된다. 오늘 가능할까? 내일 지각하면 어쩌지? 취재하면서 인터뷰가 연속인데 집중할 수 있을까? 멍청이처럼 짓거리다가 돌아와서 기사도 개판으로 쓰면 어쩌지? 데스크가 하는 일은 나를 혼내는 일인데, 요즘은 격려와 칭찬도 심심치 않게 들려준다. 시기상 이번 취재는 더 중요하다. 내가 향상하고 있다고 회사에 보여줘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런 셈이네요. 마무리로 데킬라 한 잔씩 마실래요?”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아직 모호한 상태다. 이대로 나가서 헤어질지, 박선우가 더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할지 모른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일어서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 선배다.     


- 시끄럽네. 밖에 있나 봐?

- 맥주 집이야. 이제 집에 가려고.

- 누구랑? 남자랑?

- 응. 왜?

- 됐다. 끊는다.     


김 선배는 질투하는 건지, 남성의 소유욕이 발동되는 건지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여러 남자를 만나는 걸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한다. 게다가 지금은 그냥 남자라고 했지, 하는 사이랑 있다고 하지 않았다. 질투와 소유욕 무엇이든 나에게 전달하는 게 싫고, 혼자서 온갖 상상으로 날 판단하고 있다고 느껴져 불쾌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았다. “건배하죠.” 건조한 말투로 술을 권했다. 김 선배와 통화 후 불쾌함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김동우는 “통화 내용이 안 좋았나요? 표정이 어두워요.”라고 물었다. 다행이다. 오늘은 바로 집에 갈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냥 마시죠.” 데킬라를 들이키고 레몬을 입에 물고 시큼한 과음을 빨았다. 데킬라가 소화기관을 불을 낸 거 같고, 입안은 시큼한 자극에 얼얼하다.      


“이제 일어나죠. 아, 커피 안 마셨으니까. 커피 값 보상 아직 안 하신 거예요.”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런 건가요? 커피를 보상해야겠군요. 오늘 제대로 보상도 못한 셈이네요.”라면서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반응이 나쁘지 않다. “다음엔 꼭 제대로 보상하세요.” 조만간 다시 볼 수 있다. 나는 맞은편에 오는 버스를 타고 간다고 버스시간 어플까지 켰다. 가야 한다고 압박하는 거다. 김동우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이후 [이십대 여자, 기자.] 6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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