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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Sep 28. 2021

[소설] 이십대 여자, 기자 (6)

연재소설 제 6화

#6




버스 안 혼자만의 시간이다. 집에 갈지, 김 선배에게 향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저 버스 안에도 끝없는 행선지로 쭉 달리는 기분이 든다. 아니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다.      


띵동     


이메일이 와 있다. 이 늦은 시간에 이메일을 보내다니. 내일 확인해야겠다. 지금은 너무 지쳤으니까. 술에 취했으니까 말이다.     


창밖을 보며 지난 일주일을 곰곰이 떠올리며 정리해나간다. 김동우와의 새로운 만남, 남자친구와 다가오는 결혼 준비,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하늘이의 이야기. 결혼준비가 시작되면 김 선배는 자연스레 정리해야할까? 결혼하면 나는 아이를 낳을 것인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경력단절이 돼버리고 말 거다. 남친도 내심 딩크족에 생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평생 단둘이서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 한계 없는 남성편력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나는 김동우와 잘까? 그저 지나가는 남자일까? 지나가지 않으면 어쩌려고 이런 생각을 할까. 이런 정리되지 않는 잡생각에 피곤이 더해진다. 김 선배 집 앞에 내렸다. 그리고 걷는다. 오피스텔을 지나쳐 번화가 쪽으로 걸어간다. 내 속이 조금은 조용하고 싶다. 시끄러운 번화가를 향해 걸으면서 내 속은 조용히 삭혀지는 거 같다.     


내일도, 오늘과 같겠지. 당분간은 이렇게 살고 싶다. 체력이 겨우 버티는 일을 유지하면서, 남자친구도, 김 선배도, 김동우 같은 새로운 남자도 계속 만나면서. 친구들과 가끔씩 시간을 보내면서. 그래. 피곤하지만, 이게 가장 절망 없는 시간이다. 피곤 할 뿐, 고통은 없다.               




4개월 뒤               




“안녕하세요. 고담신문의 한니나 기자입니다. 오늘은 한니나 강사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강단에 서서 나를 소개하고 있다. 인사에 이어 나의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아직 세 번째 진행하는 거라 초보강사다.     


“다음에 또 좋은 강의로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한니나 강사였습니다.”     


무사히 강의를 마쳤다. 처음보다는 심정이 무던하고, 태도도 훨씬 세련돼졌다. 처음에는 프레젠테이션과 수강생을 번갈아 쳐다보면 시선 고정을 못했는데, 이제 긴장감이 낮아지니 수강생들을 보면서, 시선을 움직이는 대신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내용에 맞는 표정을 지으며 잘 진행했다.      


- 드디어 오늘 끝났겠다! 축하해!     


차에 앉아 휴대폰을 보니, 김동우에게 메시지가 와 있다. 문자를 읽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음악차트를 틀었다. 운전대를 잡고 교광산으로 향했다. 푸른색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싶었다.      


십대부터 이십대 초반에는 실시간차트 음악은 듣지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만 담아서 들었었는데, 요즘은 최신가요가 좋아졌다. 나도 트렌드를 익혀야 한다는 명목으로 듣기 시작한 실시간차트. 힙합의 박자에 맞춰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를 때면 ‘요즘 정서’를 매우 잘 아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차로 달리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더니, 배고프고 피곤함이 밀려왔다. 강의하면서 긴장했던 게 풀리면서 운전하는 것도 너무 힘겨웠다. 이대로 집을 갈까, 카페에 가서 차 한 잔으로 힐링을 할까 고민하면서, 김동우에게 메시지 답장을 보냈다.     


- 오늘은 지난번보다 잘한 듯! 그런데 급 피곤이 몰려오네요.     


메시지를 보내고 커피숍 드라이브스루로 시원한 루이보스티 한 잔을 시켰다. 실컷 노래를 불러 대는 탓에 갈증이 났고, 카페인의 영향 없이 집에 가서 금세 잠들고 싶어서 논카페인 시원한 음료를 선택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김동우의 전화다.     


- 여보세요.

 뭐하고 있어?

- 차 한 잔 픽업해서 집 가려고 해요.

 그래. 피곤하겠다. 나는 이제 일이 끝났고, 그래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전화했어.

- 음. 되게 피곤한데. 5분간 고민하고 결정해도 되요?

 그럼~. 5분 뒤에 전화해.     


그간 김동우와 친해지면서 김동우는 나에게 말을 놨다. 나는 계속 높임말을 쓰고 있는데, 내 성격상 동등하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건 별로지만, 내심 우리가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높임말을 쓰기로 했다. 김동우는 처음에는 무게감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알면 알수록 배울 점이 많았다. 그래서 그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     


오늘은 매우 피곤하지만, 김동우와의 만남은 편안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육체의 피로와 마음의 편안함 사이에서 갈등된다.     


- 여보세요. 어디서 만날까요?

 저녁 먹을래? 아니면 차 마실래?

- 저녁은 건너뛰죠.

 그럼 오랜만에 우리집에서 보자. 혹시 모르니, 주소 다시 보내놓을게.

- 네.      


결국, 언제 갈등했나 싶을 정도로 금세 마음의 편안함을 선택했다. 김동우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베이커리에 들렸다. 아무리 저녁밥 먹을 생각이 없다지만, 피차 배고픈 상태일 테니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는 게 좋겠다. 이것저것 고르고, 디카페인 커피도 샀다.     


띵동     


“저에요.”

“응. 나도 지금 막 왔어. 들어와. 집 환기 좀 시켜야겠다. 식탁에 앉아있어.”

“네. 식탁보를 깔았네요?”

“응. 싸구려 식탁을 샀더니 볼품없어 보여서 깔았어.”

“예쁘네요.”

“그래? 그럼 잘 골랐네. 그런데 뭘 사왔어? 입 맛 없는 거 아니었어?”

“그래도 출출할 거 같아서 빵이랑 커피 사왔어요. 디카페인이에요.”

“오! 센스. 오늘 커피 많이 마셨었는데, 디카페인 커피 좋지. 하긴, 우리집에는 봉지커피 밖에 없으니……. 이참에 캡슐커피머신 살까? 원두가 캡슐에 들어서 관리하기도 편할 거 같은데.”

“캡슐커피는 괜찮을 거 같아요. 원두 관리하는 데 번거롭지도 않고. 디카페인 원두도 팔더라고요? 사놓으면 시음하러 올게요.”

“그래. 가끔 이렇게 손님이 올 때 제대로 된 커피를 대접하려면 사놓는 게 좋겠다. 나도 마시고.”

“그래요. 가위 줄래요? 빵 잘라서 먹으면 편하잖아요.”     


잘라놓은 빵과 커피를 먹으니 말없이 잠시 조용하다. 김동우네는 몇 번 와봤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그런지 별건 없고, 대강 지낼 수 있을 정도로만 가구와 가전제품을 들여 놓은 거 같다. 별 건 없어서 집안은 정갈하다. 투룸으로 된 구조인데, 침실과 서재로 만들어 놔서 내가 보기에는 좋았다. 나는 항상 서재를 갖고 싶어 했기에, 서재가 따로 있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김동우가 집에서도 일하는 사람이라는 상상이 드니 조금 더 근사해보였다.     


“강의를 마친 소감이 어때? 잘하고 왔어?”

“시원섭섭하죠. 아직 초보강사이기에 사실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데, 강대상에서는 자신만만한 척 하느라 진땀 뺐어요.”

“그래도 홍 기자. 이제 진짜 잘 나가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니야? 강의까지 하고. 더 잘 나가도 나랑 친하게 지내 줄 거지?”

“실없는 소리 마요. 강의도 또 기회가 와야 하죠. 아직까진 강사라고 불리는 건 어색해요.”

“너무 아재스러운 말이었나? 미안. 그래도 홍 기자가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처음에는 강의를 한다고 해서 놀랐어. 그런 관심사가 있는지 전혀 몰랐어.”

“사실 하고 싶은 일은 많아요. 그 중 강의도 하나였고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가 왔으니 가능했던 거죠. 운이 좋았어요.”     


4개월 전, 이메일로 강의 제안을 받았었다. 내가 쓰는 시그니처 칼럼을 보고 강연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는 거였다. 15분 강의로 진행되는데, 인터넷방송으로 생중계도 되는 거였다. 두 번의 강의를 제안 받았는데, 호응이 좋아서 1회 추가하여 총 3회 강의를 진행하게 됐다.      


나는 강의 제안에 엄청 신이 나서 매일매일 강의 자료를 만들고, 수정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느라 취재도, 기사 쓰기도 요령껏 대강대강 했다.     


“사실 나 강의하는 게 너무 설레고 가슴 벅찼어요. 꿈에 그리던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무거운 걸 내려놓은 기분이면서 동시에 더 잘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나도 예전에 학생들 가르치는 강의를 조금 했었는데, 강의는 쉬운 게 아니더라. 나는 시간제 강사였는데, 이름만 강사였을 뿐, 그저 교수에 불과했던 거지. 진정한 강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피치가 되어야 해. 강사는 두 부류야.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 교수 등이 있고, 그 이상의 스피치를 하는 강사가 있지. 나도 경험해봤지만 정말 쉽지 않았어. 그래서 홍 기자가 더 대단한데?”

“강사 교육 이수할 때, 그 교육 강사도 처음 강의 때 ‘어버버’했던 경험을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몇 번 하고나니 훨씬 잘하게 되어서 예정에도 없던 추가 강의를 진행했었다고요. 그 말은 즉, 나도 그런 거 같아요. 나도 강의가 추가 됐으니 반은 성공한 셈 아닐까, 생각하려고요.”

“잘했어. 정말 잘했어. 칭찬해!”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은 편안하다. 김동우는 나를 집으로 불렀지만, 식탁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내 컨디션이나 현재의 분위기상 우리는 대화만 하고 헤어지는 게 맞다. 김동우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집으로 부른 게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내가 피곤하니 밖에서 보다 집이 편안해한다는 걸 알고 집에서 만난 거다.     


강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다시금 기자생활을 열심히 하겠다는 나름대로의 포부를 김동우에게 쏟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했다.     


“이제 나 갈게요. 늦었지만, 밥 챙겨 먹어요.”

“그래. 이제 슬슬 퇴근시간도 지나서 차 안 막힐 거 같네.”

“네. 그리고 오늘도 고마워요.”

“뭐가 고마워. 알았어.”     


김동우는 고맙다는 인사에 머쓱한지, 말을 받는 둥 마는 둥 두 가지 대답을 한꺼번에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 이후 [이십대 여자, 기자.] 7화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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