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4부작 제 1화
#1
해가 저물자 습한 공기는 남고 뜨거운 바람은 삭여 들었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어 해가 진 후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대각선 오른쪽 방향에 화려하게 화장을 한 어여쁜 여자애가 조잘조잘 거리며 분위기에 숨을 넣고 있었다. 아는 오빠들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데 계속 그 여자애가 신경 쓰였다. 처음 보는 얼굴, 작은 체구, 화려한 머리와 화장, 짧은 치마, 남자를 홀리는 듯한 웃음소리.
'모르는 얼굴인 걸 보아선 다른 학교 선배겠다'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피했다. 괜한 시선이 시비로 번질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여자애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선배 앞에서는 긴장한 채로 있는데, 친구들만 있는 자리처럼 너무나도 편하게 있었다.
나는 계속 신경 쓰이는 저 여자아이에 대해 물어봤다.
"저기 앉은 여자, 선배야? 누구야?"
다들 번뜩 놀란 기세로 나에게 저 아이를 모르냐고 묻는다. 선배인지, 동갑인지 묻는 질문에 다른 질문으로 답이 쏟아져 나오니 짜증이 났다. 짜증을 내며 다시 물었다.
"몰라. 동갑이야? 선배야? 빨리 말해."
현진이가 대답을 해줬다.
"쟤 우리랑 동갑이야. 김다인이라고 전학 온 지 꽤 됐는데 너 쟤 처음 봐?"
현진이는 내가 다인이라는 친구를 처음 본다고 하니 서로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라, 서로 동시에 등교한 날이 없는 거 같다며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다인이를 불러 나를 소개하고, 내게 다인이를 소개해줬다. 나는 선배인 줄 알고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다인이에게 말을 붙였다.
"나는 선배인 줄 알았어. 너 되게 삭았다?"
마음에 불편함이 가시자 말에 무게를 주며 기세를 몰듯 말을 뱉었다. 다인이도 그에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너 혼자 사복을 입고 있어서 네가 선배인 줄 알았어. 너 얘네랑 친해?"
다인이는 내 친구들 무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마 나와 친해질 만한 거리가 있는지 묻는 거 같았다.
나는 다인이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녀는 내 담배를 받아 피우면서 무슨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다. 그녀는 마일드세븐 라이트를 피운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피우는 말보로 라이트를 건네며 말했다.
"요즘에는 개나 소나 마쎄(마일드세븐의 준말)를 피우더라? 유행인가 봐."
처음 만난 그녀가 적대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첫인상이 앞으로의 인상을 좌우할 거 같아 자꾸 거칠게 말이 나왔다.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친구들과 오빠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그녀에게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 기세에 약간 눌린 듯 처음보다 더 친절하게 말을 붙였다. 내 친구들은 다인이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둘이서 친하게 지내보라고 격려했다. 친구들 말로는 다인이는 안산에서 전학 온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인이 말로는 엄마가 일 때문에 수원에 오게 되어서 자신도 왔다고 했다. 여러 명의 말이 섞이고 섞여 부산스러웠다.
밤이 깊어지자 친구들은 하나둘씩 일어났다. 아이들이 일어나자 다인이는 내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신의 집이 바로 앞에 있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버스 막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집 앞에는 바이크가 있었다. 그 당시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모델인 쇼바(자리의 일본어 속어)가 잔뜩 올라간 엑시브 모델이었다.
그녀가 말없이 그 오토바이에 다가가 앉는 바람에 나는 당황했다. 당황한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그녀는 이 오토바이가 자신의 남자 친구의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있으면 남자 친구가 올 거야."
다인이는 자랑스러운 듯 오토바이에 올라 남자 친구가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생쥐 같이 생긴 마르고 작은 남자가 나타나 다인이에게 다가갔다. 다인이는 내게 남자 친구를, 남자 친구에게 나를 소개했다. 생쥐 같은 그 남자는 계속 오토바이를 살펴보면서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 욕설이 섞인 말만 해댈 뿐이었다.
다인이는 한참을 그 생쥐같이 멋없이 생긴 남자와 즐겁게 대화했다. 나도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별 의미 없는 말뿐이었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다인이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오토바이가 떠나고 우리는 비로소 집에 들어왔다. 반지하로 된 집 미다지문을 열자 깨져있는 현관문이 보였다. 문이 유리로 돼 있었는데, 보조키 옆 부분이 깨져있었다. 누군가 주먹으로 부신 것 같았다. 다인이가 자신의 환경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깨진 문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설명됐다. 그녀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문이 왜 깨져있어? 누가 그랬어?"
나는 다인이에게 깨진 문에 대해 물었다. 다인이는 웃으면서 새아빠가 부셨다고 답했다. 문을 안 열어주니 유리를 깨고 보조키를 열었다고 말이다. 상황과 다르게 밝게 답하는 그녀에게 더는 그것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정확한 답변을 듣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인이와 나는 선풍기를 틀고 방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안산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여기 와서 어떤 느낌인지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들어줬다. 잘 대꾸해줬다. 한두 시간 대화했을까? 다인이는 나에게 오늘 자고 가라고 권했다. 나는 처음 만난 그녀의 집에서 준비도 안된 상태로 잠을 청하기 불편했지만, 왠지 거절하면 다시는 그녀와 이 집에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승낙했다. 다인이는 어린아이처럼 너무 좋아했다. 마치 처음 생긴 바비인형을 끌어안은 소녀의 모습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는 친한 여자 친구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걸 알 것 같은 측은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화장대에 화장품들을 보여주며 내게 어떤 화장법을 선호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기가 화장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즐거운 거 같았다. 나는 유행하는 스모키 화장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인이는 화장하기 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며 자신의 반바지를 건넸다. 새로 빨래한 옷이 아니라 입었던 옷이었다. 나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어서 선뜻 입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입던 옷을 그냥 입었다. 그녀는 자기가 자주 입은 옷이라며 좋은 것을 준 것처럼 말했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웃었다.
화장을 하면서도 그녀는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그녀는 엄마와 친한 이모와 셋이 살다가 친한 이모는 나가고 엄마는 가끔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혼자서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방이 두 개인 집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 맞은편 방에서 내가 지내면서 같이 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느끼니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일주일 정도 지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됐는데, 최근에 엄마가 수술을 받게 되면서 요양을 떠났다. 그래서 엄마도 없이 불편하게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거보다 친구와 며칠 지내는 것도 괜찮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날 그녀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 제 2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