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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사라 Aug 04. 2021

[단편소설]불붙일수록중독됐고, 습관이 됐다. 3화.

단편소설 4부작제 3화

#3




 우리의 동거는 동네에서도 꽤 유명했지만, 다른 지역 친구들도 놀러 오곤 하면서 하나의 관광지 역할을 하게 됐다. 수원에 오면 들려야 하는 유명 아지트가 된 것이다. 


 인천을 싸움으로 석권한 박지민이 무리를 끌고 수원에 온다고 했다. 박지민은 소위 인천 대표 짱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고, 옷도 잘 입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에서 얼짱으로 유명한 만능인이었다. 인천 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에서 싸움 좀 한다는 남자아이들이 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녀석들이 우리 집에 방문했다. 우리가 박지민을 만나기로 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집에 찾아와서는 박지민에 대해 이모저모 묻더니 자기들끼리 하나의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수원에서 싸움 좀 한다는 아이들은 다 내 친구들이어서 쉽게 내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집안은 평정을 찾은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껏 화장으로 꾸미고 박지민을 만나러 나갈 준비를 했다. 나도, 다인이도 박지민과 전혀 친분이 없었다. 그저 인터넷 메신저로 아는 사이였고, 온라인상으로도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수원에 오는 김에 만나자고 약속을 정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잘 나가는 박지민을 만난다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고, 신이 났다. 박지민뿐만 아니라 인천 출신 얼짱들이 메신저와 싸이월드를 도배할 정도로 인기 있는 그룹이었고, 그들을 만난다는 건 유명 커뮤니티 카페에 이름과 사진이 거론될 수도 있었다.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얼짱이나 잘 나가는 친구들은 인터넷에 사진과 이야기를 장식하니까 흥분되는 만남이 될 것이다.


 태양이 이글이글 거리는 따가운 더위에서 두꺼운 파운데이션이 흘러내렸다. 박지민 패거리는 약속시간에 맞춰오지 않았다. 무슨 볼일이 많은지, 계속 문자메시지만 보낼 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희망이가 왔다. 오늘 만남의 주선자였다. 희망이는 아직도 못 만났냐며 짜증을 냈다. 나도 질긴 더위에 만남의 기다림이 지루해졌다.


 민희에게 연락이 왔다. 민희는 남자 친구 집에 가는 중이라며, 근처에 있으면 놀러 오라고 했다. 공원에서 하드 아이스크림에 더위를 잊고 싶었던 나는 에어컨이 틀어진 그 집으로 놀러 가고 싶어 졌다. 그래서 다인이와 희망이에게 민희를 만나야 한다고 둘러대면서 마치 중요한 약속인 양 강조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 둘을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 엄청 수선을 떨며 도망가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민희의 남자 친구는 황정현으로 한 학년 선배였다. 그의 집도 동네 아지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우리 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에어컨이 있다는 거다. 더위를 피해 정현 오빠네로 갔다. 머물던 공원과 가까웠다. 도착하니 정현오빠 혼자서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었다. 민희가 곧 올 거라며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민희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현오빠의 친구 두 명이 왔다. 다들 할 거 없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민희에게 박지민이 인천에서 온다고 말했더니, 민희도 호들갑을 떨며 조잘조잘 거렸다. 둘이 티키타카로 떠들고 있는데, 석현 오빠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밥 먹었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굶었고, 시간은 오후 2시가 넘었다. 안 먹었다고 답장을 보내니, 전화가 왔다.      


/ 여보세요

- 오빠는 짬뽕 먹을 건데, 너도 짬뽕 먹을래?

/ 저는 괜찮아요. 맛있게 드세요.

- 너 어디니? 몇 명이서 같이 있니?

/ 저....... 친구 남자 친구네 있어요. 왜요?

- 몇 명이야?

/ 5명이요.

- 주소 불러. 짬뽕이랑 군만두 보내줄게.

/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 아니야. 오빠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얼른 주소 불러.

/ 잠시만요.


"오빠들 짬뽕 먹을래요?"


 석현 오빠는 굳이 짬뽕을 배달해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모두의 동의를 얻어 배달받은 주소를 알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짬뽕 4그릇과 짜장 1그릇 그리고 군만두가 정현 오빠네로 배달됐다.


 조용히 어색하게 음식 포장을 뜯고 있는데, 혼자서 짜장면을 먹는 정현오빠가 입을 열었다.  

    

 "중화음식의 기본은 짜장이지. 다들 짬뽕을 먹니? 그리고 그 형은 탕수육도 아니고 군만두를 보내 주냐?"

 식사를 보내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부담스러웠던 나는 자리에도 없는 석현 오빠 편을 들어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보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지. 누가 이렇게 배달해주겠어."라고 말하면서 으스댔다. 다들 내 말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머쓱했는지 정현오빠는 대체 누군데 우리까지 식사를 시켜줬냐고 물었다. 그래서 새로 알게 된 오빠인데, 어렸을 때 조직 생활했었던 사람 같다고 말했다. 정현오빠는 생활했다는 말에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마치 그런 사람은 자기 주변에도 많다는 듯이 뭐라고 중얼중얼 거렸다. 그래도 다들 잘 먹었다며 기분 좋아했다. 내가 사준 거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섭고 낯설었던 석현 오빠가 사려 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순수하게 나한테 밥을 사주고 싶었기에, 자신과 동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와 같이 있는 사람들의 식사까지 사준 것 아닌가. 역시 성인의 스케일은 다르다고 느꼈다.


 배부른 채로 에어컨 바람을 쐐다 보니 다인이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어디냐고 물으니, 박지민을 만났다면서 우리 집으로 갈 거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희망이에게 전화했다. 희망이는 같이 있다면서 대답도 듣지 않고 끊었다.


 밖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신발장에 서있는 아이들을 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여러 명 중에 역시 박지민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작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인물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박지민은 신기한 눈빛으로 집에 들어오면서 '여자들이 사는 집이라서 그런지 좋은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다. 나는 빨래해서 그런 거라고 답했다.


 아이들은 다인이가 자는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가 들어오자 방이 꽉 찼다. 남자애들 6명과 여자 3명이 방바닥에 앉아 있기에 좁았다. 박지민은 몇몇 애들에게 거실로 나가라고 말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는 바로 재떨이를 가져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박지민은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펴도 되냐고 물었다. 다인이가 담배 펴도 된다고 대답하면서 말을 채갔다. 


 박지민은 생각보다 순한 모습이었다. 여자 둘이 동거하는 우리 집이 신기했는지, 계속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계속 집에 대해 물었다. 자연스럽게 다인이와 둘이 대화를 하고 있자, 희망이가 술을 사 오자고 말하며 둘의 대화를 끊었다.      


 "누가 술을 사 와?"


 박지민은 어색하게 물었다. 다인이가 나를 보며, '쟤가 사 올 거야.'라고 대답하자, 박지민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뚫리냐'라고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치 촌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처럼 태연하고 세련된 척 대꾸했다. 박지민은 지갑을 꺼내서 삼만 원을 쥐어줬다.     


 "이 돈으로 될까?"


 소주만 사 먹던 나와 다인이에게는 큰돈이었다. 희망이는 돈 되는 대로 사 오면 된다고 대답하며 같이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박지민은 자기네 일행들도 데리고 갔다고 오라고 했는데, 나는 걔들이 어색해서 그냥 희망이 와 다녀오겠다고 대꾸하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희망이가 다인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여시 같은 년이라 같이 놀기 싫다고 했다. 둘이서 박지민을 데리고 오면서 무슨 일이 있던 거 같았다. 다인이는 남자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애교를 부리는 게 습관인 거 같은데, 희망이는 그 모습이 눈꼴 시린 거 같았다. 그러면서 박지민과 그 일행들이 자기 친구들이라면서 자기 때문에 온 거라고 강조했다. 


 오징어 세트와 소주를 잔뜩 사고 맥주 피처 두병을 사서 들고 나오니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박지민이 친구들을 데리고 가라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여자 둘이 들기에는 술이 너무 무거웠다. 돈이 부족해서 맥주를 더 안 산 게 다행이라 느껴졌다. 낑낑거리면서 집에 도착하자, 다인이는 박지민과 배달음식 책자를 보고 있었다.     

 "매일 시키던 순살치킨 시켜."


 나는 매일 먹던 순살치킨 두 마리 세트를 시키라고 말했다. 다인이는 메뉴를 고민한 게 아니라 돈이 없었는지, 나와 희망이에게 돈을 내라고 말했다. 나는 희망이에게 계산을 먼저 하면 나중에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숨겨둔 지갑을 꺼내면서 돈의 위치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치킨이 도착하기 전에 박지민은 친구들을 시켜 슈퍼에 다녀오게 했다. 아무래도 치킨 두 마리로는 9명이 먹기에 적은 양이었다. 일행들은 잔뜩 과자와 콜라를 사 왔다. 다인이는 자기가 콜라를 좋아한다며, 콜라를 골라 들고 갔다. 나는 다인이 방에 작은 상을 펴고 글라스 잔을 세팅했다. 나머지는 내가 자는 방바닥에서 먹기로 했다. 


 박지민은 소주를 권하자 소주는 너무 독하다며 소맥을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맥주가 금방 동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박지민에게 소맥을 따라줬다.     


 "나도 소맥 마실래."


 다인이가 박지민을 따라서 마시겠다고 했다. 희망이는 콜라를 마셨다. 나와 동석해있는 박지민 친구의 앞에는 글라스 잔 가득 소주가 따라져 있었다. 그냥 마셨다. 너무 써서 희망이의 콜라를 마셨다. 그런데 글라스 잔으로 소주를 마시는 나를 보고 박지민이 술을 잘 마신다고 치켜세웠다. 계속 놀라움의 연속인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이 계속 포착되니, 박지민도 별 수 없는 애구나 싶었다. 놀아봤자 얼마나 거하게 놀아봤으며, 잘 나가봤자 얼마나 잘 나가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박지민보다 우월해진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술잔은 계속 채워졌고, 술병은 비워져 갔다. 박지민은 술을 잘 못 마셨다. 가장 느리게 잔을 비웠다. 그러면서 벌겋게 된 얼굴로 취기가 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이 만만해 보였다. 그래서 괜히 더 소주를 따라 마셨다. 내가 취한 거 같았다. 치킨과 오징어는 금세 동이 났고, 과자들도 바닥을 보였다. 술판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이른 밤이었다. 술상을 치우지는 않고, 대화만 했다. 합석해있는 박지민의 친구는 호스트바로 일했던 경험을 풀었다. 생긴 건 못생겼는데, 힙합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호빠 선수들은 잘생긴 사람과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두 부류가 있다고 했다. 그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적나라한 성행위에 대한 내용까지 서슴없이 말했다. 모두 술에 취해있어서 야한 말도 무색하지 않고 재미있어했다.


 그러다 현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김택연과 같이 있는데 우리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낮에 우리 집을 찾아온 싸움 잘하는 친구였다. 나는 순간 긴장이 되면서 가슴이 떨려왔다. 싸움이 날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친구들에게 김택연이 온다고 말했다. 여자애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변하고, 박지민은 누구냐고 물었다. 희망이가 '네가 시비 걸러 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박지민은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깨를 씰룩씰룩 으쓱거리면서 자기가 인천 대장이라고 웃었다. 


 현진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김택연과 한창연이라는 친구가 우리 집 앞을 기웃거렸다. 내가 나가서 김택연한테 왜 왔냐고 따져 물었다. 우리 집에서 무슨 일 나면 가만 안 있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김택연은 괜히 씩씩대면서 박지민만 만나면 된다고 했다. 나는 목소리 톤을 바꿔서 좋은 날인데 좋게 넘어가자고 달래듯이 말했다. 김택연은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큰 소리로 박지민을 불렀다. 박지민이 나오고 다른 일행들도 같이 나왔다. 쪽수가 차이 났다. 그러자 김택연은 공원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박지민과 일행들은 김택연을 따라갔다. 낮에는 우만동 친구들도 몰려왔었기에 쪽수가 비등했지만, 지금 김택연은 꼬봉처럼 찌질하게 구는 한창연과 둘이서 박지민을 대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자들은 쪼르르 달려와서 김택연을 말리듯이 애원해댔고, 박지민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김택연은 박지민과 둘이서만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박지민은 웃으면서 괜찮다며 김택연을 따라 저 멀리 공원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긴장하면서 둘을 바라봤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둘은 줄담배를 연신 피워가며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김택연이 한창연을 불렀고, 박지민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박지민은 심각한 얼굴로 걸어왔지만, 우리를 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유혈사태는 안 나는 분위기였다.     


 "김택연이 뭐래?"

 희망이가 쏘는 듯이 말을 꺼냈다.     

 "몰라. 그냥 잘 있다 가라던데?"


 박지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김택연은 돌아와서 우리에게 공표하듯이 떠들었다. 박지민과 대화해보니까 괜찮은 친구라면서, 술 취한 애랑 자기는 싸우지 않으며,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오해들 하지 말라면서 잘 놀고 가라고 말하며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마 김택연은 쪽수에 밀려서 싸움을 그만둔 거 같았다. 그리고 박지민이 키가 크고 훤칠해서 체급만으로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택연이 명분 없이 싸움을 거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김택연이 돌아가면서 싸움이 날까 조마조마했던 긴장이 풀리고, 싱겁게 상황이 끝났다. 


 공원에 남은 우리 무리는 술을 더 마시기로 했다. 남자아이들은 술이 다 깼다면서 술을 사러 갔다. 애들 모두 공원에 남고 나는 술상으로 어지럽혀졌을 집을 치우러 현진이와 희망이를 데리고 갔다. 다인이는 계속 박지민 옆에 머물렀다.


 희망이와 현진이는 다인이 욕을 했다. 여우같다고 말이다. 나는 다인이가 의도하는 건 아니라고 편을 들었다. 희망이는 내가 왜 다인이를 감싸고도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희망이는 아까 다인이가 박지민의 무릎에 앉아서 끼를 부리는 모습을 못 봤냐며, 더럽다고 했다. 현진이도 그 말을 듣고 동감했다. 나는 둘 다 취했다고 말하면서 집안을 정리했다.


 정리를 끝내고 애들과 다시 공원으로 돌아갔는데, 박지민과 김다인이 둘만 떨어져 앉아 키스를 하고 있었다. 먼 곳으로 옮겨 앉아 있었지만, 둘이 붙어먹는 모습은 잘 보였다. 희망이는 몹시 기분 나쁜 듯이 걸레 같은 년이라면서 저 년 때문에 술맛도 떨어졌으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남자애들도 있으니 같이 있어달라고 붙잡았다.


 희망이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거 같았다. 다른 남자애들은 자기들끼리는 심심했는지 계속 우리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노상에서 술을 마시면서 놀고 있는데, 박지민과 김다인이 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희망이도 그 모습을 보더니 집으로 가자고 일어났다. 나는 희망이를 앉히고 다 마실 때까지 놀자고 했다. 두 남녀가 왜 집으로 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이는 질투와 분노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삼켰다. 씩씩대는 모습에 그 감정들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남자애들이 희망이에게 말을 많이 걸어서 기분이 나아져 가는 듯 보였다. 그렇게 술병이 비워지고 자리를 파하게 됐다. 집으로 돌아오니 두 남녀는 티비를 보면서 태연하게 우리에게 이제 왔느냐고 말했다.


 나도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망이는 술에 취했는지 다인이에게 대놓고 걸레년이라고 욕을 했다. 다인이는 미친년이라고 대답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나는 분에 찬 희망이를 데리고 나와 희망이를 집에 데려다줬다. 희망이는 계속 투덜투덜 거렸지만, 취했는지 제 맘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다행이었다.


 홀로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이들은 다들 자기 자리인 양 누워있었고, 다인이 방은 잠겨있었다. 옅은 신음이 방문 사이로 흩어져 나왔다. 아이들이 못 듣게 하려고 거실 티비 볼륨을 크게 키웠다. 그러나 애들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르는 척하는 내 행동을 가만히 두고 봤을 뿐이다. 나는 도저히 집에서 잘 수 없어서 정현오빠네로 갔다. 재워달라고 했더니 정현오빠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정현오빠의 어머니 방에서 혼자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집으로 갔다. 아이들 모두 자고 있었다. 씻어야 하는데 이 남자애들이 가득한 소굴에서는 씻을 용기가 없었다. 갈아입을 속옷과 옷을 챙기고, 정현오빠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다시 집으로 갔다. 화장실 너머로 박지민이 오줌 누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나와 나를 보더니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가장 흡족한 밤을 보냈을 박지민 모습이 왠지 보기 싫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하고 언제 갈 거냐고 쏘듯이 말했다.

 인천 대장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진상은 끈적한 여름의 땀내처럼 시큼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 마지막편, 제 4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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