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대충 적당히 해왔던 나에게 보내는 글
뭐 하나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부류와 가늘고 길게 가고자 하는 부류.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걸까. 태생이 다른 걸까? 나는 어릴 때부터 뭘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 어린이는 아니었다. 시험 전날에도 10시면 잠에 드는 아이였다. 도서관을 가도 연초에 바글바글하게 도서관 문 닫을 때까지 하겠다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적당한 시간대에 산뜻하게 집에 가버리는 학생이었다. ‘어차피 12월 말까지 나올 사람은 나야’하는 다소 냉소적인 마음을 안고.
이런 성격은 운동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곤 했다. ’정말 힘들 때 하나 더!‘ 이걸 해내야 근육이 붙는다던데 나는 이게 참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운동을 가는데 의의를 가장 크게 뒀다. 최선을 다해 운동을 갔지만 가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안 간 것보다는 그래도 가서 하나라도 하는 게 낫잖아?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해도 괜찮다던지 혹은 이렇게 하는 게 더 낫다던지 하는 주장이 나오지만 예전 분위기로는 나는 조금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았었다. ’왜 기껏 와서 욕심을 안내?‘하는 말과 시선이 곧잘 나를 향했다. 하지만 특히 크로스핏은 다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기에 나는 개수든 무게든 절대로 욕심내지 않았다. 그렇게 운동해 왔기에 이토록 운동 구력이 오래되어도 기본 동작조차 완성이 안 되는 게 허다하다. 처음 1~2년 차 때는 나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사람이 나보다 빨리 어떤 동작들을 수행하는 걸보고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뒤처지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오래 이 바닥을 지켜봤을 때 그때 그렇게 사력을 다하던 사람들이 번아웃이나 부상으로 운동과 멀어지는 것을 보며 과연 무엇이 더 나은 것일까 하는 고뇌를 해보곤 했다.
운동에서 ’열심히’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주 5일을 가되 적당히 운동하는 사람과 주 2회를 가되 몸이 부서져라 운동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열심히 하는 것일까? 물론 혹자는 주 5회를 가되 몸이 부서져라 할 수는 없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진짜 ‘열심히’란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실제로 운동 중독자들은 저렇게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위의 선지에서 굳이 고르자면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고 말할 것 같다. 나처럼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면 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고, 운동 또한 유기체처럼 인생 전체와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전자에 속하는 내가 볼 때 후자는 그 마지막 하나를 도전하지 않는 태도가 인생 전반에 녹아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그런 태도이기에 운동도 마지막 하나를 하려 들지 않는 것인지 운동을 그렇게 적당히 하기에 삶의 다른 영역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 가깝기는 하다.
사실 이번 글은 오전 요가에서 물구나무서기를 너무 간단하게 포기해 버린 나에 대한 썩 좋지 못한 감정에서 출발한, 온통 자기 합리화로 가득한 글이다. 운동을 꼭 열심히 해야 할까?라는 회의적인 물음에서 출발한 글이지만 끝은 열심히 해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맺어보려 한다. 더 좋은 퍼포먼스, 더 좋은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나의 삶에 작은 것일지라도 성취하는 기쁨을 하나라도 더 안겨주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