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1차 시험날의 기록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수험생이 된 지 10개월 되는 2021년 5월, 첫 1차 시험을 치렀다.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뒤늦게 공부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결과로 증명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이자 시험대였다. 경제활동으로부터, 아내로부터, 딸로부터, 며느리로부터 오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잠시 뒤로 한 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 주변 사람들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 첫 1차 시험은 2차 시험을 보기 위한 자격 그 이상을 의미했다.
크고 작은 시험을 치러본 경험에 의하면 나는 시험장에서는 긴장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이번 시험이 무척 부담은 되었지만 막상 시험 시작종이 치고 나면 예전처럼 긴장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사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1교시가 시작되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되고도 긴장이 안 풀린 경험이 난생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당황하니 글자도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수없이 문제를 풀고 시간을 관리하는 연습을 해왔었는데 하필 멘털이 터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시간도 잘못 계산해서 20분 남긴 줄 알고 풀고 있다가 10분 남았다는 감독관에 말에 또다시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 1교시 시험이 너무 어려웠다. 개인적인 견해일 뿐만 아니라 이번 시험은 역대 최저 합격률을 달성한 해이기도 했다. 보통 1차 합격률이 30% 정도였는데 이번 해는 반토막인 15%의 합격률을 기록했다. 첫 시험인 데다가 엄청난 난이도를 경험한 초시생이 문제를 마주하면서 멘털을 유지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1교시에서 과락(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의 점수가 나오면 불합격이다)이 날 것 같다는 불안감이 2교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교시도 정말 정말 눈물 날 만큼 어려웠다. 통상적으로 평균점수를 끌어올리는 효자 과목이라 불리는 행정소송법이 역대급으로 어렵게 나왔다. 같은 2교시에 치르는 회계학도 역사상 최대의 과락률을 기록했다. 시간이 없어 회계학을 한 번호로 마킹하는데 찍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웃기면서도 슬펐다. 아, 참고로 세무사 1차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은 시간 내에 못 푼 문제는 찍어서 마킹하는 연습도 꼭 해야 한다. 이것도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라 시간 내 찍은 것 마킹까지 하는 연습을 안 하면 마킹도 못하고 답안지를 제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내 생에 첫 세무사 1차 시험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시간 맞춰 데리러 온 남편 차를 타고 남편에게 꺼낸 첫마디는 “나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였다. 일 년을 또 1차 공부를 해야 한다니 아찔했지만 저 말이 내 진심이었다. 집에 가는 동안 수험생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반응을 살펴보았다. 다들 역대급으로 어려웠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1차 시험은 절대평가(모든 과목 과락 없이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어렵다는 것은 불합격의 핑계 또는 이유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큰 위로는 되지 못했다.
세무사 1차 시험은 시험 당일 오후 2시경에 정답이 발표된다. 오전에 시험을 치르고 긴장이 풀려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2시가 되어 답안지를 다운로드하였다. 과락이 가장 걱정되는 과목부터 채점하기로 했다. 내가 정한 과목별 채점 순서는 회계학-세법-재정학-행정소송법이었다.
옆에서 남편이 숫자를 부르고 나는 채점을 했다. 다행히도 회계학은 풀은 문제는 거의 맞았고, 못 푼 문제는 2번으로 찍었는데 그게 4문제 정도 맞았다. 찍은 문제로 10점이 오르면서 예상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제 세법 관문만 넘으면 되었다. 40문제를 다 채점했는데 과락을 넘긴 건지 긴가민가했다. 동그라미 친 것의 개수를 세었다. 이때가 가장 떨렸다. 실질적으로 나의 당락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40개 중 딱 20개를 맞아 50점을 받았다. 합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나머지 재정학과 행정소송법 과목을 채점하고 합격점수 이상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노력이 중간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에,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지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부담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너무 기뻤다. 가족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전하고, 남편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제주도로 떠나서 짧은 휴가도 즐겼다.
3~4일간의 휴가를 즐기고 본격적으로 2차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2차 시험까지는 100일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공부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해서 을지로에 있는 학원으로 실강을 다녔다. 일주일 정도 학원에 다니고 또다시 부딪히고 깨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1차 시험에 붙어서 이 고생을 할까?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1차 합격을 확인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는데 언덕을 넘고 나니 눈앞에 태산이 서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