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희곡
창작 희곡 단편집.
등장인물
엄마(52세) : 현실적이고 고생 많았던 주부.
아빠(55세) : 말수 적지만 은근한 허세.
딸(25세) : 직장인, 센스 있고 현실적.
아들(16세) : 사춘기지만 속 깊음.
사장(60대) : 오래된 동네 사진관 주인, 넉살 좋음.
1장 사진관 가기 전, 집
엄마 : (옷장 뒤적이며,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을 찾는다) 이거 어때? 이 한복. 품이 좀 좁긴 한데, 색은 곱잖아.
딸 : 엄마, 그건 너무 구식이야. 그냥 깔끔한 블라우스 입어. 사진관 조명도 다 흰색이야.
엄마 : 그게 뭔 상관이야. 사진은 단정해야지.
아빠 : (양복 입으며 거울 보다가) 이 양복, 여전히 멀쩡하네. 이거 결혼식 때 입은 건데 배만 좀 불편하지 다 잘 맞네.
딸 : 아빠, 그건 멀쩡한 게 아니라 유물이에요.
어깨뽕 봐요. 산처럼 솟았잖아요.
아들 : (귀찮은 듯) 그냥 후드 입고 가면 안 돼?
나 친구랑 약속 있는데. (검은색 청바지. 하얀 티 위에 후드 걸침)
엄마 : (눈을 부릅뜨며) 사진 찍고 가! 평생 한 번 찍는 건데 후드는 무슨 후드야! (가족 모두 입고 나가려다 서로의 옷차림 보고 멈춤)
딸 : 우리, 이 상태로 찍으면 진짜 포스터 될 듯.
(가족들 각자 개성 있게 옷을 입고 나간다.)
2장 사진관 입구
사진관 입구. 무료 가족사진 이벤트 현수막 앞.
아빠 : (자랑스럽게) 자 봐봐.
아빠가 이런 행사 정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는다니까! 무료야, 무료!
엄마 : 무료라니까 불안하네…
혹시 나중에 액자 값은 별도. 뭐 이러는 거 아닌가? 몰라!
아빠 : (자신만만하게) 아니야! 다 포함이래.
대신 SNS 홍보용으로 우리 사진 쓴대.
엄마 : (깜짝) 그럼 내 민낯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고? 잠깐만, 나 얼굴 엉망이지? (가방에서 화장품 꺼내며 거울 보기 시작)
엄마 : (잠시 후, 찝찝한 얼굴) 아휴, 다리야.
뭔 건물에 엘베도 없어. 아들 얼마나 더 가야 해?
아들 : (4층) 다 왔어요. 경치는 죽이네.
딸 : (핸드폰 보며) 요즘 이런 거 다 마케팅이에요.
찍고 나서 뭐 팔 거예요, 분명히.
아빠 : (손 내저으며) 아~ 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누구야? 안 사면 그만이지! 세상엔 아직 공짜도 있다니까!
아들 : (귀찮은 목소리) 아빠, 나 그냥 친구 만나러 가면 안 돼요?
엄마 : (정색하며) 자꾸 친구 핑계 대지 마라. 찍고 가, 처음 가족사진 찍으러 왔는데, 꼭 그래야겠어?
모두 마지못해 옥탑 사진관 안으로 들어간다.
3장 옥탑 사진관
간판 “칠성 사진관 - since 1984”
사장 : 어서 오세요~ 4층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들 : (투덜대며) 사장님, 다행인 줄 아세요.
한 층만 더 높았으면 우리 다 돌아갔을 거예요.
사장 :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데 잘 안 오는데
반갑네요! (조명기를 만지며) 이게 80년대 조명기예요. 그래도 짱짱해요~
딸 : (걱정스러운 목소리) 조명이 아니라 박물관인데?
사장 : 저... 그럼 사진 찍기 전에 서로 상의 한번 해보실게요. 어떤 식으로 가족사진을 찍으실 건지. 먼저 지금 입고 오신 그대로 자연스럽게 찍으실까요? 아니면 몇 가지 있는데 어떻게 찍으실 건지?
첫째는 자연스러운 내추럴 스타일이 있습니다.
가족 모두 청바지에 흰색 티를 입으시고 맨발로 소파 위에서 웃는 컷 하나. 가족끼리 포옹하며 찍는 컷 하나.
두 번째는 라이프 스타일.
입고 오신 일상복 그대로 집에서 어머니 요리하는 모습. 아버님 커피 마시는 모습. 따님 책 읽는 모습. 아드님 웃는 모습. 마지막으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모습.
세 번째 테마형 스타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 콘셉트.
크리스마스 파자마 가족 샷.
전통 한복 입고 가족 샷.
마지막입니다. 엘레강스 스타일.
부모님과 함께 ‘리마인드 웨딩’
아빠 슈트, 엄마 드레스.
따님 심플한 드레스.
아드님 슈트.
사장 : 어떤 스타일로 하실지 상의 시작~
저는 불로연초 한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딸 : 저는 그냥 내추럴 스타일 좋아요. 친구들 가족사진에서 많이 봤어요.
아들 : 저는 그냥 친구 만나러 가면 안 될까요?
딸 : 야, 너. 진짜.
아빠 : (옷을 고르는 번거로움과 의상 대여비 문제를 피하고 싶은 심정으로 설득 분위기) 아빠는 지금 우리가 입고 온 그대로 라이프 스타일. 좋겠어. 당신은?
엄마 : (아빠의 마음을 눈치채고, 시무룩한 표정)
저는 웨딩드레스 한번 입어 보고 싶은데?
옷값은 따로 달라고 하겠죠? (엄마 말에 모두 눈을 마주하며 아빠의 눈치를 본다.)
아빠 : (옛날 생각하며) 음...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엄마와 결혼식을 못 올렸지. 그냥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어. 그래서 엄마 평생소원이 웨딩드레스 입어보는 거라고 했어.
딸 : 엄마, 아빠 어떻게 만나셨는지 엄마한테 이야기 많이 들어 잘 알아요. 엄마 좋으실 대로 해요. 아빠. (딸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눈시울을 적시며 훌쩍거린다.)
4장 과거 회상
무대에 희미한 불빛. 바느질 소리 칙칙, 딱 이 반복된다. 넓은 바느질 책상. 책상 한쪽 끝에 라디오가 있다.
딸 : (내레이션) 엄마는 어릴 때 정말 가난했어요. 남들은 새 교복을 입고 학교 갈 때, 엄마는 새벽부터 인형공장에 앉아 인형 눈알을 꿰매고 있었어요.
무대 위, 어린 엄마. 바느질하며 손가락을 찌른다.
어린 엄마 : (작게 신음하며) 아… 또 찔렸네. 괜찮아, 괜찮아…
딸 : (내레이션) 손끝은 늘 바늘에 찔려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공장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학교 종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멀리 느껴졌어요.
라디오의 잔잔한 음악이 들려온다.
라디오 DJ (아빠 목소리) : 네, 지금 들으신 곡은 바나나라마의 ‘Venus’였습니다. 늦은 밤까지 일하시는 분들께 힘내시라고, 마지막으로 셀린디온의 ‘The Power of Love.’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노래로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일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괜찮아요, 오늘도 잘 버텼어요.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어린 엄마 : (작게 따라 웃으며) 저 목소리… 참 따뜻하다.
딸 : (내레이션) 그때 엄마의 유일한 위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노래였어요. “괜찮아, 오늘도 잘 버텼어.” 그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면서도 힘이 났다고 했어요.
무대 전환. 허름한 밥집. 성인 엄마. 설거지를 하고 있다. 비가 살짝 내리는 소리.
딸 : (내레이션) 몇 년 뒤, 엄마는 공장을 그만두고 밥집을 시작했어요. 하루는 허름한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들어왔어요.
젊은 남자(아빠) : (문을 열며) 여기…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엄마 : (엄마가 국자를 들던 손을 떤다, 속삭이며) 이 목소리… 설마…
딸 (내레이션) : 그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매일 들었던 그 사람이었어요.
젊은 남자(아빠) : (된장찌개를 맛보며 미소 짓는다) 이 된장국 참 맛있네요. 여기에 사장님 마음을 듬뿍 넣으셨나 봐요.
엄마 : (살짝 웃는다.)
딸 (내레이션) : 그 말에 엄마는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웃었다고 했어요. 그날 이후, 아빠는 매일 밥집에 왔고, 엄마는 국물을 조금 더 붓곤 했어요.
무대에 비 내리는 소리. 버스정류장 벤치. 두 사람이 앉아있다. 조명은 푸른빛.
젊은 남자(아빠) : 예전엔… 무슨 일 하셨어요?
엄마 : 인형 눈알 꿰맸어요. 그게 제 일터였어요.
젊은 남자(아빠) : 그럼… 혹시 제 라디오에 사연 보내주셨던 그 ‘눈알 소녀’가…?
조명이 살짝 따뜻하게 변한다.
라디오에서 과거의 음성이 재생된다.
라디오 DJ (과거의 아빠) : (신청 사연을 읽는다.)
저는 인형 눈알을 꿰매는 소녀예요. 제 손은 거칠지만, 언젠가 제 인형처럼 예쁜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합니다. 아바의 ‘I Have a dream.’
잠시 음악 소리 작아지면서 같은 목소리로.
라디오 DJ (과거의 아빠) : 그 소녀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손입니다. 왜냐고요?… 누군가의 희망을 달아주니까요.
음악 다시 원래 음으로 나간다. 버스정류장 벤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다. 손을 맞잡는다.
딸 (내레이션) : 그렇게 두 분은 비 오는 날 이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아빠의 집에서는 가난하고 배움이 짧은 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 아빠는 집을 나왔고, 그렇게 지금까지 세월이 흘렀어요.
무대에 따뜻한 조명.
엄마가 아이의 옷을 꿰매고 있다.
딸 (무대 앞으로 나와) : 그 소녀의 손은 이제,
우리 가족의 옷을 꿰매고, 이불을 덮어주며 가족의 세상을 만들어주는 손이 되었죠.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라디오에서 아바의
‘I Have a dream.’ 노래가 흐른다. (조명이 꺼진다)
엄마의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빠. 딸의 말에 엘레강스 스타일로 하기로. 어렵게 결정한다.
5장 가족사진 촬영
사장 : 자, 가족 다 같이 서보세요. 아버님은 가운데, 어머님은 살짝 앞으로. (조명 조정하며) 이 조명 밑에서 웃으면요, 인생이 환해집니다~
아빠 : (괜히 기분 좋아져서 허리 펴며) 그럼 밝게 한번 웃어볼까!
엄마 : (작게, 남편을 쳐다보며) 이빨 보이지 말고 입 다물고 웃어야 품위 있어요.
딸 : 엄마, 입 다물면 인상 써 보여요!
딸 (내레이션)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처럼 긴장이 되었는지 굳은 얼굴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고, 아빠는 턱이 앞으로 조금 들려 있고, 딸은 얼짱 각도를 한다며 얼굴을 자꾸만 옆으로 돌리고 아들은 빨리 사진 찍고 친구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에 얼굴 표정이 없다.
아들 : (뒤에서 몰래 고개를 흔들며) 이거 완전 단체전이네…
사장 : 자, 아버님은 턱을 가슴 쪽으로 당기시고 눈은 들고 여기를 쳐다보세요. 어머니는 고개가 왼쪽으로 조금만 이렇게 움직여 주시고요. 따님은 다른데 보지 마시고 저를 보세요. 여기. 여기. 아드님. 아드님은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다들 웃으시면서 여기를 보세요.
딸 (내레이션)
아빠는 턱을 내리자. 고개가 숙여졌다. 그 상태에서 사진관 사장을 바라보자니 눈은 커지고 눈동자는 위로 올라갔다. 엄마는 고개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운다. 딸은 사진관 사장이 하나, 둘하면 다시 각도를 바꾼다. 아들은 사진관 사장이 아무리 웃으라고 해도 무표정이다.
사장 : 자~ 그럼. 어쩔 수 없어요. 그냥 편하게. 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딸 : 잠깐! 나 눈 감았어요. 다시오.
사장 : 괜찮아요, 다시 갑시다. 자,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에요. 하나~ 둘~ 셋. 찰칵.
6장 촬영 후
사장 : 사진 시안들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골라보세요.
엄마 : (사진을 보며 웃는다) 그래, 이거 이게 진짜 우리 가족이지.
딸 : (살짝 눈시울 붉어지며) 이 사진… 따뜻하다.
아빠 : 이거, 집에 걸자.
아들 : 저 이제 가도 되죠?
엄마 : 안 돼.
아빠 : (조용히) 이렇게 우리 모두 사진 찍은 게 처음이네.
엄마 : 그러게요. 다음엔 손자 손녀랑 찍어요.
딸 : 그땐 아빠 어깨 뽕빼고요.
아들 : 저 이제 가도 돼요?
아빠 : (사진을 들고, 다 같이 아빠 주변에 서서)
오늘 저녁은 가족사진 찍은 기념으로 파티를 하자~
사장:저 아버님 이쪽으로 잠시만. 그러니까, 의상비, 사진 큰 거, 사진 액자. 모두 해서. 이 만큼 계산하시면 됩니다. (계산서를 보여 준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가족사진 찍으셨잖아요. 그래도 행사 기간이라 반값에 드리는 겁니다.
엄마, 아들, 딸 : 사진을 보면 마음에 들어 흐뭇하고, 사장을 보면 기분이 언짢고. (잠시 기분이 묘해진다.)
엄마 : 어쩐지 좀 불안했어.
아들, 딸 : 그러니까요.
아빠 : (큰 소리로 분위기 반전)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또 찍겠어?이나마 싼 가격에 좋은 사진 찍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하지. 안 그래?
사장 : (가족사진을 들고) 사진 너무 잘 나왔어요. 이렇게 나오기도 힘들어요. 어머니.
엄마, 아들, 딸 : (한쪽에서 한참 상의 한다.)
아빠, 우리 사진 잘 나왔으니까,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리고 사진은 작은 거 한 장씩 가져가는 건 어때요? 큰 사진은 집에서만 볼 수 있지.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어서, 별로예요.
아빠 : 그래?
엄마, 아들, 딸 : 네~~
아빠 : 그럼 사장님. 저희는 이걸루 네 장.
사장 : 아니. 사진 잘 나왔는데. 거실에 걸어 놓으실 사진은? 안 하시고요?
아빠 : 그러니까. 저는 그걸로 하고 싶은데. 다들 이쪽을 원하니. 그냥. 작은 거 네 장으로 하겠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가족들 객석을 보며 인사한다.)
사장 : (객석을 보며)
혹시 가족사진 공짜로 찍으실 분. 안 계시나요?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