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단편 희곡
창작 희곡 단편집
등장인물
엄마 : 민서 맘. 46세.
민서 : 23세 약대 4학년
유진 : 23세 최연소 변호사
준호 : 25세 약대 4학년
무대 중앙. 작은 원목 탁자. 의자 두 개.
우측 : 작은 책장과 스탠드 조명
좌측 : 낡은 2인용 소파.
후면 : 창문 모양의 프레임.
1장 엄마의 방문
딩동 딩동
민서 : 누구세요?
엄마 : 민서야 엄마야.
(엄마 좌측에서 중앙으로 들어온다.)
민서 : 어 엄마? 웬일.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면 어떡해. 다음부턴 미리 온다고 연락하고 와요. 예?
엄마 : 얘는 딸 집에 오는데 무슨 연락하고 오냐? 지나가다 보고 싶으면 오는 거지.
민서 : 암튼 됐고. 무슨 일 있으세요?
엄마 : 너 이번에 졸업반이잖아.
내년에 취직도 해야 되고, 취직하면 시집도 가야지. 그래서 말인데. 이리 좀 앉아 봐라.
(엄마, 민서 원목 탁자 의자에 앉는다.)
민서 :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엄마 : 니 나이가 제일 힘든 나이 아니냐. 취업 걱정하랴. 결혼 걱정하랴. 엄마도 다 안다.
민서 : 엄마 요즘 누가 결혼 걱정을 해. 안 하고 혼자 사는 애들 얼마나 많은데.
엄마 : 그래서 엄마가 왔다. 요즈음이 어디 조선시대도 아니고 시집가기 싫으면 안 가면 되지. 그래. 시집 안 가고 혼자 살아도 괜찮다.
민서 : 오 우리 엄마 신세대?
엄마 : 엄마가 요즘 태어났으면 니네 아빠 안 만났을 거다.
민서 : 갑자기 아빠 이야기는 왜 하는데?
엄마 : 그러니까. 세상 남자 다 똑같다 생각하고 요즘 '계약 연애' 유행한다고 하던데? 죽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함부로 정 주지 마라. 정말.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이 사람 아니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거든. 그래도 몇 번은 더 생각해 보고 그래도 이 사람이다 생각이 들거든. (작은 목소리) 너도 그런 거 함 해봐라. 평생 혼자 엄마랑 산다고 뻥치지 말고. 너 덕분에 엄마 속이 뻥 터지겠다. 이것아.
민서 : 엄마 어디 아파? 오늘 왜 그래?
엄마 : 그래. 아프다. 오늘 네 아빠랑 헤어진 지 20년이다.
민서 : 무슨 결혼기념일도 아니고 이혼 기념일을 다 챙겨? 왜 아빠 보고 싶어서 그래?
엄마 : 거 피카소가 모차르트 피아노 치는 소리 하지 말고, 올해 니가 몇 살이고?
민서 : 스물셋. 엄만 딸 나이도 몰라?
엄마 : 니 나이에 아빠가 이 엄마 좋다고. 하늘에 별도 다 따 준다고 하는 말에 속아서 결혼했는데. 나중에는 엄마보고 별 따 오라고 해서 헤어졌잖아.
민서 : 그 얘기는 왜 하는데?
엄마 : 그래서 말인데. 넌 엄마 닮아서 이쁘니까. 혹시 남자 친구 생기면. 엄마처럼 이렇게 되지 말고. 알았지? 이 얘기하려고 왔어. 엄마 물 한 잔.
민서 : (일어나 물 갖다 전달.)
무슨 엄마가 딸한테 계약서 쓰고 남자 만나래?
엄마 :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돼서.
민서 : 난 시집 같은 거. 생각 없고 엄마랑 평생 살 테니까.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엄마 : 엄만 이런 소리 하고 싶겠어? 사랑하는 사람 만나 평생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 그러니까. 절대로 별 같은 거 따준다고 하는 것들은 믿지 마라.
민서 : 우리 엄마. 참. 불쌍해. 엄마도 남자친구 좀 만나고 그래.
엄마 : 야. 내 걱정하지 말고 니 걱정이나 잘해. 졸업하면 골목에 작은 약국이라도 차려 줄게. 엄마 간다.
엄마 : (독백) 내 다 안다. 하늘에 별도 달도 다 따준다고 하던 니 첫사랑 병수. 그 애 부모님이 의사 아들한테 시집오면서 병원 건물도 하나 못해 주는 며느리는 필요 없다고 못 만나게 하고는 나중에 니 친구랑 결혼시킨 거. 들어서 다 안다. (엄마 좌측으로 퇴장.)
민서 : 다 잊고 잘 사는데 왜 와서...(눈물 훔친다.) 요새 누가 골목에 약국 차려.
2장 사랑 계약서
무대 중앙. 작은 원목 탁자 (와인, 잔 2개, 계약서, 펜, 노트북)
조명, 따뜻한 노을빛.
음향, 잔잔한 재즈 피아노, 창문 밖엔 가벼운 빗소리. (우측에서 민서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다. 무대 중앙에서 유진은 와인을 따르고 있다.)
유진 : (민서에게 다가간다. 서류를 흘긋 보며)
이게 뭐야? 사랑 계약서? 너 요즘 유튜브 실험 같은 거 시작했어?
민서 : (차분히, 시선을 노트북에 둔 채) 실험 아니야. 정리야. 준호 오빠랑 나… 감정이 들쭉날쭉하니까. 기한이라도 정하면 덜 흔들릴 것 같아서.
유진 : (잔을 들며 관객 쪽으로 한 걸음) 기한 있는 사랑이라. 요즘 젊은 커플들, 진짜 다 이렇게 계약하고 사는 거야?(관객에게 속삭이듯) 근데 나 변호사잖아. 이건 법적으로는 효력이 없어요. 정서적으로는 구속력이 꽤 있겠지만. (조명 한 줄기. 문 두드리는 소리.)
준호 : (들어오며)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나 빼고 무슨 회의라도 한 거야? (민서가 노트북을 닫고 서류를 들고 중앙 탁자 위로 미끄러뜨린다.)
민서 : 회의 맞아. 우리 관계에 대한 회의.
준호 : (웃으며) 회의? 그건 보통은 회의적일 때 쓰는 말인데?
민서 : 그럼 더 적절하네. (서류를 건넨다) 계약서야. 읽어봐. (조명이 살짝 좁혀지며 탁자 중심 클로즈업 효과.)
준호 : (서류를 집어 들고 읽는다.)
사랑 계약서.
1. 계약 기간은 6개월이며, 연장 여부는 상호 동의하에 결정한다.
2. 서로의 개인적인 시간(공부, 취업 준비, 친구 관계)을 침해하지 않는다.
3. 질투, 집착, 감정적 폭언 금지한다.
4. 신체적 접촉은 상호 동의 하에만 가능하다.
5. 동거 공간의 청소·식사·생활비는 공평하게 분담한다.
6.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면, 한쪽의 통보로 계약은 즉시 해지된다.
7.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며 계약 종료 시. 서로를 비방하거나 연락하지 않는다.
사랑 계약서? 사랑의 유효기간 6개월? (웃음) 이게 뭐야, 사랑이 무슨 회사야? 계약을 하게? 넌 갑이고 난 을이야?
민서 : 사랑은 감정인데, 감정은 계약보다 불안정하니까. 그러지.
(잠시 정적. 유진이 와인잔을 흔들며 말한다.)
유진 : 변호사로서 조언하자면…
너무 치밀하면, 감정이 숨 쉴 곳이 없어져요.
민서 : (단호히) 숨을 쉬게 하려면,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해.
(민서가 서명한다. 펜 소리 강조. 준호가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펜을 든다.)
준호 : 왜 이럴 때 영화 중경삼림 생각나지?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민서 : 금성무가 한 말이잖아.
준호 : 그치, 우리 사랑은 오늘부터 유통기한 6개월인 거야? 나도 만년으로 하고 싶은데.
민서 : 서명할 거야 안 할 거야?
(서명 후, 와인을 따르고 건배를 한다.)
유진 : (독백)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지만, 감정엔 유통기간이 있답니다. 그걸 아는 사람만 덜 아프죠 (음악, 조명 페이드아웃. )
3~4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