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홀리데이의 꽃 '워킹' 그 2탄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고 했을 때, 한국에 있던 친구는 말했다.
워킹이면 워킹이고,
홀리데이면 홀리데이지.
워킹홀리데이는 뭐냐.
기가 막힌 카피들이 있다. 배달의 민족의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와 캐시워크의 "건강이 캐시다",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이름부터 왠지 가면 홀리데이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주객이 전도되는 기똥 찬 이름.
이전 글에 이어 캐나다에서 했던 WorkWorkWork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두 번째 프리랜서 잡으로는 콘텐츠 디자인 일이었다. 한인 레스토랑의 홍보 콘텐츠를 제작했다. 밴쿠버의 한인 사이트 "밴조선"이라는 곳을 이용했고, 대표님과 간단한 면접을 통해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일도 첫 번째 일과 비슷했다. 처음엔 인스타그램에 올라가는 영상과 이미지를 제작했다. 그러던 중 대표님께서 로고와 포스터를 만들 줄 아냐 물어봤고, '사이즈만 다른 거 아니야?'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실무에선 처음으로 일러스트레이터 툴을 다루게 되었고, 출력물에는 출력 후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걸 '도련'이라 불렀다. "별씨 이게 필요하다던데?"와 같은 질문에 하나씩 추가하며 배워나갔다. 포스터와 메뉴판, 쿠폰 등 여러 작업물을 만들었다.
새로운 매장이 오픈날 날, 제작된 영상을 매장 밖 TV에 틀어놓았다. 그 영상을 빤히 바라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진짜 마지막 워킹! 조식 레스토랑.
사실 레스토랑 분위기는 좋은 곳이었다. 세상 아버지 같은 조니 세프님, 마음 잘 맞는 한인 코워커들, 적절한 시간과 팁까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키친 코워커였다.
키친 코워커는 나를 키친 헬퍼를 넘어 자신들의 헬퍼로 생각하는 듯했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면 여러 나라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몇몇 나라의 수직적 문화를 느꼈다.
워홀을 떠나기 전엔 '서양의 여유로운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문화 국가에서 문화를 경험하고 껴안는다는 것은 "그 안에 속한 나라가 가지고 있은 위계질서도 경험하겠다"는 걸 의미했다. 나날이 지쳐가며 점점 귀국 각을 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가엾이 여기셨던 것일까? 퇴사를 남기기 한 달 전부터 레스토랑이 개편되기 시작했다. 오너가 바뀌었고, 온 나라의 사람들이 키친으로 들어왔다. 피지, 대만, 이탈리아,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코워커들이 함께 일했다. 등 뒤로 새로운 나라의 사람들이 지나다. 그러나 키친 바닥에 껌을 떼고 있던 나는, 모든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여기까지가 캐나다에서 워킹의 기록이다. 진짜 이런 말 안하는 편인데, 힘들었다. 영어는 생각 이상의 장벽이었고, 문화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일한다는 건 새롭고 재미있었지만, 괴롭고 힘든일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조식 레스토랑 오픈으로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 새로 온 오너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오너는 대만에서 온 여성이었다. 밴쿠버라는 낯선 땅에 와 큰 레스토랑의 오너까지 되었다니.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Do you like cooking(너는 요리를 좋아하니?)"
"Of course, That's why I am here(물론이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지)"
그녀의 말과 행동이,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을 하며 행복해했다. 적어도 살아나 있었다. 다시 한국에 가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다.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방에서 회상하는 글을 올릴 수 있어 좋다. 다행이다.
오늘은 2023년의 마지막 날이다. 이 글을 써야지 하고, 미루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9개월 간의 장기간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경험은 나를 더 채우기 위해 하지, 한편으론 미련이 없기 위해 하기도 한다.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아쉬움은 있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그 당시의 최선을 다했다.
2024년은 조금 더 현명하게 work의 세계로 빠져 들겠다. 나의 프로젝트는 계속 업데이트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