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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북과 함께하는 인생여행, 사흘

영혼의 재발견, 데이 그라티아 신의 은총으로

by 해리포테이토

카를 융은 환상을 보았다.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고 융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비둘기나 갈매기 같은 흰새가 앉아 있는 것을 본다. 융은 아이들이 새를 놀라게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흰새는 작은 여자 아이로 변해 있었다. 융은 소녀가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본다.


그 흰새가 아마 <레드북> 1장에 시작하는 그림 속 새일 것이다. 흰새는 'D'자 안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다. D자는 라틴어의 어느 어휘의 시작을 표현한 것으로, 영어의 Day인 라틴어 Dies(디에스), 또는 '주님'을 뜻하는 'Dominus'(도미누스) 또는 '신의 은총으로'를 뜻하는 'Dei gratia'(데이 그라티아)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 시작하는 문장이 "1913년 10월에.... 의미 있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인 것으로 보아, '날'을 뜻하는 Dies일 수 있다.


'1913년 10월에 홍수 환상을 보았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레드북 18쪽)


나는 "데이 그라티아" 신의 은총을 불러본다. 많은 환상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내면여행을 잘한 것은 신의 은총이지 싶다.


Dei gratia


융은 레드북 1권 2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소리쳐 부른다. 꿈들로 인해 혼란스럽다고, 꿈들이 영혼을 아이나 처녀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신비를 모르겠다고. 그러자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정신이 융에게 말한다. 꿈의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꿈들이 결정한다고, 심지어 꿈들이 행동과 결정을 좌우한다고.


그리고 매우 실질적으로 유용한 말과 또 앞으로 곱씹으며 삼켜야 하는 말들이 나온다. "나는 나 자신이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해."(23쪽) "당신은 그 인물 자체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26쪽)




융은 1961년 8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몇 년 전인 1958년에 그는 <인간과 상징>을 집필했다. 82세의 나이에도 글을 썼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2009년 <인간과 상징>을 통해 융의 분석심리학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2009년은 융의 <레드북>이 독일과 미국에 출판되면서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해였다. <인간과 상징>을 읽기 시작하던 2009년 7월 그때부터 나는 꿈만 따로 적는 일기장을 마련하여 지금까지 꿈을 기록하고 있다. 꿈기록장 1권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레드북을 읽으면서 다시금 상기하고 있다. 그때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면여행을 시작했던 것이다.




융이 그린 흰새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작은 소녀 느낌이 든다. 융이 여러 신화를 연구한 것과 '영혼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새는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 알 수 있다. 영혼은 이집트에서는 생명의 본질인 'Ka'로 보았으며, 죽음은 곧 카가 떠나는 것이었다.




Carl Jung RED BOOK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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