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기억, 글쓰기라는 차원이동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 글은 흥미롭다. 세상에는 많은 차원이 있다. 무성한 잎을 단 떡갈나무의 차원에서부터 가지에 깃든 새들과 언제든 달라붙을 준비를 하는 진드기의 차원 등.
정릉에서 살 때였다. 나무도 많고 골목길도 정겨워 강아지와 산책하기 좋았다. 신나게 냄새를 맡고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소심하게 다가갔던 그 강아지 이름은 '뽀송이'. 뽀송이와 함께한 11년. 나는 여름이면 진드기를 떼냈던 그때가 떠오르곤 한다.
뽀송이는 내가 책을 읽을 때 양반다리한 내 무릎 위에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내가 더 좋아했던 것도 같다) 어느 여름 오후, 뽀송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책을 읽는데, 등에 뭔가 만져졌다. 작고 딱딱하고 동그란. 수박씨처럼 생겼다. '어제 먹은 수박씨가 붙은 건가'.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본드에 붙은 것처럼. 이게 뭐지 하며 나는 수박씨 가까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 이런...' 촘촘한 바느질이 된 걸 보는 것처럼, 아주 많고 가느다란 다리가 살갗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서둘러 뽀송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시골 할아버지 같은 동물병원 원장님이 뽀송이를 진료한 뒤, 트로피처럼 진열된 시험관들 중에서 비커 한 병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진드기가 들어 있었다. 저런 거대 진드기가 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끈기있게 붙어 있었을까. 인상 깊은 진드기였다.
뽀송이는 한 삼일정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왔고, 한동안 약을 먹은 뒤 건강해졌다. 뽀송이 등에 달라붙기 전, 진드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느 풀잎 어느 나뭇잎에 매달려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따끈한 피를 가진 동물에게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나무에는 예쁜 새만 있는 게 아니니까. 나무가 사람에게만 이로움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진드기까지 품어주는 나무는 생명의 나무다. 모든 나무가 그렇다. 무더운 여름, 살인적인 열기에도 나무 밑에 서면 살 것 같다. 나무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리는지. 나무는 하나의 우주, 하나의 지구와 다르지 않다.
<떡갈나무 바라보기>라는 책에는 인간의 시선이 아닌 동물과 곤충의 시선까지 아우르며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과학책으로 분류되지만 나는 철학책으로 여겨진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 내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입장을 회의하게 한다. 끊임없이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여기 등장하는 많은 동물들이 내게 주위를 둘러보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하고, 때로는 명상 혹은 상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싫어 떼버리고 싶은 부정적 존재를 가리켜 진드기라고 표현한다. 진드기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 강제적으로 떼어낼 때 살점이 일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진드기는 인내심의 끝을 보여준다. 자기에게 적합한 포유동물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기다린다. 로스토크의 동물연구소에는 18년을 기다리고 있는 진드기가 있다.
모든 동물들이 각자 경험하는 공간과 시간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환경'과 구별하여 ‘움벨트’라고 말한다. 동물의 삶에서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나이지리아의 아피크포 사람들은 일주일을 4일로 정했다. 그들에겐 나흘이 생활 주기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자꾸 엉뚱하게 공상하게 만드는 동물이 있다. 소금쟁이와 대합조개. 대합조개는 요요 같은 세계에 산다. 그들에게 오른쪽 왼쪽 앞뒤는 의미가 없다. 위아래만 중요하다. 진흙 속을 파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경우는 다르다. 위아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 해야 맞겠다.
소금쟁이에게 세계는 2차원의 평지다. 그들은 물 위 표면장력을 일으키는 ‘얇은 막’ 위에서 산다. 표면장력이 깨지면 죽는다. 소금쟁이는 나뭇가지나 물속에서 자기를 노리는 동물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그리도 경쾌하게 살다니!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소금쟁이에게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어쩌면 이 세계는 삼차원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차원, 오차원 아니 그 이상이 있을 거다. 지금 내가 앉은자리 옆 어디쯤에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이곳에서 위로받지 못 한 자들 그곳에서 위로받고, 이곳에서 춥고 배고팠던 이들 그곳에서 따스하게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이곳에서 고속도로 만든 이들은 그곳에서 로드 킬도 당해 보고, 이곳에서 흐르는 강물을 막고 휘젓고 하는 이들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어떤 존재는 인간을 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작 삼차원의 세계에 살면서 저리도 오만하다니!”
나는 이 세계가 삼차원이 아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로 판타지를 들고 싶다. 아이들은 판타지를 믿는다. 아이들에게 판타지는 유토피아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의미가 ‘누구나 꿈꾸는 어디에도 없는’이라면, 판타지는 ‘누구나 꿈꾸는 어디에나 있는’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것이 속도와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의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이해하기 힘든 동물이 또 등장한다. 먼저 당나귀. 때는 14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뷔리당은 갈등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몹시 굶주린 당나귀를 온종일 일을 시킨 후 마구간으로 데려온다. 그러고는 건초 더미를 두 군데 두고 중간에 당나귀를 세운다. 당나귀는 먹이를 먹으러 어느 쪽으로 갈까? 양쪽 건초 더미의 양과 거리는 똑같다. 결국 당나귀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자유와 선택. 똑같은 크기의 강렬한 본능이 충돌하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 ‘뷔리당의 당나귀’다.
뷔리당의 당나귀에게 물어보고 싶다. “건초 더미 중간에 서 계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먹이지도 않고 종일토록 열라 일만 시키더구먼 알고 보니까는 다 실험이었다 아닙니까. 참 내 얄궂고 미봐서 먹는 걸 거부했다 아닙니꺼. 인간들한테 더 이상 실험 당하지 않을라꼬, 안 먹은거라예.” 이렇게, 본능의 충돌로 선택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어쩌면 인간들에게 한방 먹이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상상 역시 내 움벨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다음으로 물고기. 동물행동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콘라드 로렌츠 박사는 물고기 수컷 시클리드의 행동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수컷 시클리드는 새끼들을 입에 담아 보금자리로 옮긴다. 어느 날 그의 눈앞에 지렁이가 놓인다. 냉큼 입에 넣고 또 새끼도 얼른 입에 문다. 관찰하던 박사는 이 물고기가 어찌할까 바짝 긴장한다. 입 안에 있는 성질이 다른 물체. 하나는 먹어서 소화시켜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보금자리로 데려가 보호해야 하는 것이기에. 수컷 시클리드는 두 물체를 입에 문 채 고민한다. 생각하는 물고기 시클리드는 잠시 고민 후, 둘 다 뱉어내고는 지렁이를 먼저 먹은 다음 여유 있게 새끼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물고기 시클리드는 흑백논리의 사고에서 벗어나 있었나 보다. 유연한 사고가 지혜롭게 처신하게 한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고기 시클리드를 만나기를 권한다. 그밖에 싸우면서도 적을 배려하는 방울뱀과 오릭스 영양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책을 추천하고 감수한 최재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점이 다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 책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요구한다. .... 책을 덮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내 삶이 달라 보일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우리는 차원을 이동한다. 세상에는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 평생 가난하게 살지라도 재벌가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 평생 기차여행밖에 못해본 사람이 우주여행과 SF를 쓸 수 있는 것은, 글쓰기가 차원이동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