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의 소설 <코>를 읽고
독후감은 일기만큼이나 글쓰기의 기본이다. 좋아하는 책을 집어들고 내가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을 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안 쓴다. 기억나지 않지만 쓰고 싶은 것은 다시 책을 본다.
'나'를 드러내는 코, 변신에의 욕망
코를 뜻하는 러시아어 hoc [nos]를 거꾸로 하면 꿈 coh [son]이 된다. 러시아 작가 고골이 쓴 소설 '코'는 사실은 꿈 이야기였다. 고골은 처음에 제목을 ‘꿈 Son’이라고 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모든 것은 주인공 꼬발료프 소령의 꿈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골의 소설 '코'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민음사)
<빼째르부르그 이야기>는 러시아의 옛 수도 상뜨 빼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하는 고골(1809~1852)의 소설집이다. 이 도시에 '이반 야꼬블레비치'라는 이발사가 있었다. 옛날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외과 의사 일을 겸했었다. (이발소 간판에 있는 빨강파랑 줄무늬는 피를 빼주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3월 25일 이발사 이반 야꼬블레비치는 아침 식사로 나온 빵 속에서 코를 발견한다. 코의 주인은 그의 고객 중 하나인 꼬발료프였다.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야꼬블레비치'는 코를 버리려고 돌아다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 그리고 야꼬블레비치 이야기는 사라지고 갑자기 코의 주인인 '꼬발료프'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마치 느슨한 링크로 이리저리 의미가 연결되는 꿈처럼.
꼬발료프는 사라진 코를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8등관의 꼬발료프가 5등관으로 변신한 코를 되찾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관료 사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코는 변신 이야기이다. 변신은 인간의 깊은 소망 중 하나가 아닐까. 세계의 부조리함을 알아버린 사람은, 그 세계를 견디어내기 위해 변신을 꿈꾸지 않을까. 인과성이 사라진 꿈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세상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 한때는 5등관 행세를 하며 마차를 타고 장안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떠들썩한 소동을 일으켰던 코가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다시 제자리에, 즉 꼬발료프 소령의 얼굴 한가운데 돌아와 앉은 것이다. 어느새 4월 7일이 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민음사 47쪽)
이반 야꼬블레비치가 빵에서 코를 발견한 날은 3월 25일, 마지막에 꼬발료프 소령이 코를 되찾은 날은 4월 7일. 이 두 날은 사실 같은 날이었다. 코(hoc)가 꿈(coh)인 것처럼. 두 날짜는 각각 구력(舊曆)인 율리우스력과 신력(新曆)인 그레고리력으로 표현한 것. 한국식으로 음력 3월 25일이며 동시에 양력으로 4월 7일인 셈이다.
그러니까 고골의 소설 '코'는 하룻밤 '꿈' 이야기였다.
작가 고골의 생애를 잠시 살펴본다. 그는 고향 우끄라이나를 떠나 꿈을 안고 상뜨 빼쩨르부르그로 상경했었다. 그는 관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도시 생활은 힘들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다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신화와 민담을 떠올리며 다양한 귀신 이야기와 정령들에 대한 글을 쓴다. 이것이 러시아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그는 인기 작가로 변신한다.
도스또예프스키는 고골의 <외투>를 읽고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말했다. 이 무렵 고골은 <죽은 혼>을 쓰고 최고의 명성을 누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은 혼>의 속편을 쓰면서 쓰라린 절망을 느낀다’ 창조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10년간 온갖 노력을 다 하다가 결국은 종교에 자기를 던지고, ‘저주받은 영혼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광신적인 사제의 영향을 받아, 그의 명령에 따라‘ 원고를 불태운다. 열흘 뒤 그는 반미치광이 상태에서 죽는다.
고골은 할아버지로부터 신화와 민담이라는 문학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로부터는 예술적 영역을, 어머니로부터는 종교적인 영역을 물려받았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말년에 그랬듯이 그의 어머니도 광신도였다.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종교가 영혼을 볼모로 잡고 오히려 몸과 정신과 영혼을 고통으로 빠뜨리는 경우다.
고골이 10년 동안 자신의 창조성이 사라졌음을 느끼며 두려움과 간절함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갔을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글에는 ‘작품성’을 떠나 ‘영혼성’이 들어있을 터. 그런 원고를 불태웠을 고골의 모습이 이글거리는 불길과 겹쳐 보인다.
그가 소설 곳곳에 장치해 놓는 상징과 의미성을 살펴보면 (물론 모든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글쓰기는 그에게 숨을 쉬게 하고, 더러움을 걸러내는 정화 기능을 하고, 동물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드러내는 자존과 정체성으로서의 ‘코’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글쓰기는 '코'처럼 숨쉬게 한다. 호흡하게 한다. 답답했던 마음에 산소를 공급해주면서 혈색이 돌게 하고 활력을 준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