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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세우는 작고 단단한 글쓰기 25화

여행과 불면, 땅파기

by 해리포테이토

글쓰기는 여행이다. 여행을 하면 기록이 하고 싶어진다. 잘 자고 잘 다니면서 글을 쓰면 좋으련만 나는 여행을 가면 잠을 잘 못 잔다. 짧은 여행이든 긴 여행이든. (지금은 약을 챙겨가지만 전에는) 생으로 밤을 새우거나 술을 먹어 정신을 잃게 만들어 곯아떨어진다. 나는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내면공부가 필요한 시기가 왔고 나는 여기저기 마음을 손보기 시작했다. 그때 불면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불안이 원인인 것 같은데 그래도 더 구체적인 뿌리에 닿고 싶었고 그래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연필로. 땅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했고 연필은 다이아몬드처럼 질겼기에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땅이 갈라지며 그 속을 보여주었다.



네댓 살 때이다.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배에서 내린다. 할머니는 여섯 명의 손자 중 이 아이를 특히 각별하게 생각했다. (각별함이 애정이었으면 좋으련만.) 해가 지기 시작하는 바다는 젤리처럼 물컹물컹해 보였고 타고 온 배는 통통배라고 부르는 작은 여객선이었다. 무인도처럼 조그만 섬에 도착한 할머니는 아이와 함께 어느 집에 들어간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 아이를 구경한다. 아이는 새파랗게 질려 입을 닫는다. 조용하고 말없는 아이를 사람들이 즐겁게 해 주려고 애를 썼고 그중 어떤 삼촌이 아이를 자전거 짐받이에 태워 섬을 돌며 구경시켜 주었다. 자전거를 타는 게 섬에서의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그맣고 보드라운 아이의 오른발이 자전거 뒷바퀴에 쓸려 들어가 발이 찢어진다.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가 길게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른다. 약방도 의원도 없는 섬. 아이의 오른발은 밀가루 반죽으로 봉인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된장을 바르는 등의 처치를 하지만 오히려 악화가 되고, 결국 섬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병원에서 마취 없이 발을 꿰맸다. 섬에서 소리 낼 수 없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나는 미친듯이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엄마 아빠 언니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의사가 발을 꿰매는 동안.


내가 네댓 살에 버려지듯 유배당하는 신세가 된 것은 어떤 타당하고 너무도 이해 가능한 이유와 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 합리적인 이유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나는 그때 그 아이가 새파랗게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나의 내면 아이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했었다.



땅을 파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땅을 파는 일, 신나게 파내려가면 괴이한 괴물도 만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도 만난다. 아이가 그렇듯 괴물 역시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 뭘 알아내기 위한 땅파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도 땅을 파고 있다. 오늘은 이런 글을 쓰면서 또 보물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아 그때 자전거 타던 즐거움이 지금으로 이어지는구나.. 그때 아이는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믿음이 없어서 즐기지 못했구나.. 하는 등의.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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