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학자와 숨겨둔 딸, 평범과 비범,
2권 2장 숲 속의 성
융은 홀로 숲을 걷다가 늪지에 서 있는 성을 발견하고 들어간다. 그곳에는 평생 책과 함께 한 노인이 있다. 융은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데,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상상을 한다. 노인이 자신의 딸을 성 안에 숨겨놓고 있을 거라는 상상. 융은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여기는데, 이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딸이 모습을 드러낸다.
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난 딸은 자기가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갇혔고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이어 두 사람은 보편과 궁극, 평범과 비범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비범한 것은 인간과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인간적인 것 또는 진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에 지혜가 있으며, '평범한 실체도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노인의 딸은 융과 대화를 나눈 뒤 고마움을 표현하고 '살로메의 인사'를 전한다로 말하고 사라진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장미꽃들이 놓여 있다.
평범과 비범에 대해 곱씹어본다. 가만 생각하니 나는 자기답게 사는 것을 비범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개성적인 삶은 평범하지 않다고. 물론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도 있다. 여기서의 평범은 인간적인 것으로, 신성한 것이나 저 너머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땅에서 오래도록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이를 테면 동화 같은 것이다. 노인의 딸이 "동화는 소설의 어머니"라고 말한 것처럼.
동화 그러니까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에는 단순함이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전의 불합리성이 있다. 그래서 몸으로 와닿는다. 민담과 신화가 그렇고 오늘날의 동화가 그렇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처럼. (이 소설 같은 동화는 동화의 아름다움과 혁명성을 잊고 지내던 많은 어른들에게 다시금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는데) 형제가 죽고 또 죽고, 용이 불을 내뿜어도 공포가 아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동화는 대체로 약하고 평범한 주인공이 비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사건을 겪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변화되는 이야기이다. 변화된 존재는 예전의 자신과 달라지고 비범해졌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비범 역시 평범과 같아진다.
균형의 성취는 당신이 자신의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을 배양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그러나 균형은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이유는 그것이 결코 영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02쪽)
영웅적이고 비범하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아주 솔직해야 한다. 너무 터무니없는 욕망을 품은 경우 감히 입 밖으로 발설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융은 강조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것에 대한 욕망을 면밀히 조사해 보라"고. "그런 조사만으로도 그 욕망에 변화를 이룰 수 있다." (103쪽)
이번 장은 융이 자신의 내적 탐사 과정에서 자신의 붉은 존재를 만난 뒤, 내면의 노학자와 그의 딸을 만나서 깨달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생명이 없는 존재처럼 나타났던 노인의 딸은 생명을 표현하는 장미꽃으로 변하였다. 융은, 남성들에게 자신의 내면의 여성성을 찾으라고,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남성성을 찾으라고 강조한다. 남자에게 남자답다는 것, 여자에게 여자답다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편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03쪽)
융의 여성성은 영혼과 거의 동일시하여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이번 장에서는 노인의 딸로 등장하였다가 빨간 장미꽃으로 변형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질서 정연한 세계에도 속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경이로운 세계에도 속한다. (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