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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북과 함께하는 인생여행, 열이틀

죄의 이미지들, 투사와 예언, 외눈

by 해리포테이토

2권의 시작은 '죄의 이미지'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붉은 눈동자의 외눈과 독일어 'DIE BILDER DES IRREN DEN'가 있는데, 이 말을 해석하면 "광인의 생각 속 이미지들" 혹은 "미친 사람의 상상 속 이미지들"이다.


융이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올라온 많은 이미지들이 광인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을 고백적으로 선언한 어휘로 보이며, 이 광인의 이미지들은 단순한 광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붉은 눈동자의 외눈 그림에는 예레미아서 23장이 실려있다. 예레미아가 거짓 예언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자기 마음의 생각들을 마치 예언인양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투사를 비판하려는 융의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투사는 본인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들(시기나 질투 등의 불안정한 마음)을 타인에게 던지면서 덮어씌우는 것이라면, 예언은 신의 계시 혹은 비전을 봄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리는 것이다. 투사는 자신이 시기나 질투 등의 마음으로 했다고 대부분 인정하지 않기에 정작 본인은 투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점쟁이나 성직자가 투사를 한다면 예언과 더더욱 구별이 어렵게 되는데, 이때는 정말 개인의 진실성과 시간의 흐름만이 답이다. 시간이 지나야 투사인지 예언인지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직동에 살 때 꿈에 외눈이 나온 적 있다. 거실에서 싱크대에서 내가 뭔가를 하다가 문득 창문을 본다. 창문은 집 밖 골목길을 향해 나 있다. 커다란 창문에 커다란 눈동자가 하나 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다.


예전에 그리스 여행을 하다가 외눈을 만난 적 있다. 지중해 근동에서 파는 행운을 부른다는, 악마를 물리치는 부적처럼 파는 '이블 아이'다. 푸른 빛의 눈동자, 너무 아름답고 신비해 악마적으로 보이는 눈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외눈이 있다. 외눈박이의 거인 키클로페스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난 원초적인 존재들이다. 거인들은 대체로 거칠고 야만적이고 팽창된 미성숙한 에너지이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키클로페스는 지하에 갇혀 지내다가 제우스에 의해 풀려나게 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둥과 번개를 선물로 준다. 제우스를 상징하는 천둥 번개, 즉 직관과 통찰은 외눈박이 거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북유럽 신화의 오딘도 외눈이다. 처음부터 외눈은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 아래 미미르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한쪽 눈을 뽑아주고 지혜를 얻는다. 뽑아 준 그 한쪽 눈은 깊은 곳을 보는 또 다른 눈이 된다. 외눈의 오딘은 희생의 대가로 얻은, 보다 더 집중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도 있다. 바로 호루스의 눈이다. 호루스는 아버지 오시리스를 죽이고 왕권을 강탈한 삼촌 세트와의 무지막지한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는다. 고통을 견디며 전투 끝에 결국 왕권을 되찾는다. 하나의 눈은 고통 속에서도 초점화된 시선이다. 다양하게 보는 대신, 집중해서 꿰뚫어 보는 눈이다.


융이 그린 외눈 그림에는 눈동자 주위에 자잘한 실금이 나 있다. 마치 유리조각이 박살이 난 것처럼 빠지직 빠지직 깨어져 있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다. 때로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고 위로와 치유를 받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런 상처의 경험을 가지고 산다.


꿈에서 외눈을 만나던 그 무렵 나는 성취와 오만, 기대와 좌절과 실망과 불안같은 상처와 고통, 쾌락과 무기력 등 여러 일들을 겪었는데, 그 시기를 떠날 때쯤 물고기 꿈을 꾼다. 나는 물고기를 먹는다. 맛있게 먹는다. 맛이 느껴진다. 누가 물고기 이름을 말해준다. 물고기의 이름은 경험치라고. 갈치나 꽁치처럼.


정확하게 어떤 내적 영양분을 섭취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때 겪은 경험이 광인의 상상 속 이미지로 자리 잡고 나도 모르는 원초적인 힘, 상처입었지만 초점화 되어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상상해 본다.




칼 융 레드북, 부글북스 88쪽



오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브런치 '나의 세계 나무는' 참고

https://brunch.co.kr/@dreamwitch3/37


이집트 신화 이야기는 전자책 <지아의 박물관 내 안의 신을 만나다> 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11966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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