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발레리아들
발레리아, 대부분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 발레리나인가요?’
기실 그녀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그러나 발레리나처럼 공중으로 도약해서 지상으로 내려올 것 같지 않다. 주방에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냄비의 어떤 꼭지처럼 동그란 복사뼈를 돌출하고 번쩍번쩍 잘 닦인 편수냄비를 꺼꾸로 들고 무한한 흰 죽을 우리에게 흘려줄 것 같은 마고할미 아닌 마고신상아주머니.
실제로 그녀의 세례명으로 선택한 발레리아는 실존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그 존재나 행적이 제한적이다.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최승자, ‘일찌기 나는’
성녀 발레리아는 프랑스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때문에 개종하였고 결국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고 한다.
결국 삶의 지리멸렬과 파사칼리아. 저음 선율의 반복과 변주. 곰팡이나 오줌 자국 같은 행적은 없었으나, 벌레가 좋아하고 구더기에 덮힌 무엇은 있었다. 무명순교자탑에 날리던 눈 싸라기알 같은 게 되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남겼다.
성녀 발레리아 어깨에도 물병자리 별들의 천연두 예방 불도장. 그 우두 자국이 있을까. 이상하게 돌올한 왼쪽 눈 아래 눈물받이 검은 점이 오상五傷, Five Wounds처럼 패였을까.
하지만 확인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핑크릴리 같은 미증유의 행적들. 희뿌옇고 가늘고 흐릿하다가 마지막은 머리 잘린 여신의 흉상처럼 남아 떠돌기.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승자, ‘일찌기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수천 수만의 발레리아들이 결국 이 성녀의 행적을 채워넣고 기입하여야 하는 불가사의한 소명 때문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대체로 지상의 발레리아들은 ‘유성조차 깃들기 어려운’ 쥐구멍에서도 겅중겅중하며 도전하고 전진하기를 멈추질 않는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선별적으로 부양하고 그들과 엄숙히 다른 방식의 삶을 요청하고 있는 현실의 무수한 발레리아들. 그녀들은 고난을 받더라도 정신의 숭고한 역병 속에 스스로를 밀어넣어야 한다. 일상의 불목하니적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 수만의 발레리아 중 한 명인 발레리아는 아이 *, **, ***의 엄마. 모두 학교 밖 교육을 하고 있다. 그리고 ** 문화 디자이너로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발레리아 성녀의 실존 여부가 확실하지 않듯, 현실 교육에 포섭되지 않은 채.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최승자, ‘일찌기 나는’
새로운 교육을 꿈꾸는 엄마와 아이들이 ‘날아다니는’ 소강의실에 발레리나처럼 복사뼈를 들고 둥둥 떴다. 모두들 학교에서 점심 식단에 빨간 동그라미를 치며 졸고 있을 4교시.
야호, 오늘의 메뉴는 깻잎들깨마라상궈 제육볶음 & 딸기탕후루이네. 공부라는 놈은 어떤 버섯머리를 하고 있나. 게슴츠레한 눈과 달리 이미 두 발은 식당으로 달려갈 채비를 끝낸지 수십 만 년.
시험 점수 소숫점 몇 점 차이에 등수가 달라졌다고 희번덕하게 시끄러운 자모회님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신들은 거의 모두 반에서 1등을 놓친적 없으나, 수능 당일 시험을 망쳐서 난 이렇게 낙후되고 열등한 존재가 됐어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요약본으로나 간신히 읽은 '햄릿' 강의라고 한다. 강의자의 성함을 보니 학창시절 성적표가 궁금하네요. 우수수수만 받으시고. 아마, 우 하나는 체육? 오로지죽은 자들의 책들. 세상에서 참수당했을 것 같은 자들의 책만 읽으셨으려니. 미양가는 혹시 못 받으셨나요? 우리는 미양가 집안이라서요. 호홋홋.
햄릿Hamlet은 작은 마을이라는 뜻, 자기 마을에 갇힌, 자기 혼자 주민인 우리들의 현재와 같다는 거. 작은 화분에 큰나무를 심으면 깨지는 이유를 깨달은 시간.
허만 멜빌은 햄릿주의hamletism를 이렇게 정의했다고 한다. 감각은 시시각각으로 쥐구멍 속에 일 분 일초의 볕처럼 변한다. 모든 인식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두 개 이상의 가능성을 두고 늘 의심한다. 알고 보니, 우리가 햄릿, 바로 우리 자신이네.
구름을 보고 낙타 같다면 아니라고 한다. 족제비라고 하다가 고래 등 같다고 한다. 이 시대에 걸맞게 햄릿 다시 쓰기를 제안하며 강의는 끝난다.
여기 햄릿이라는 작은 마을에 모인 원더보이 매직걸들아. 발레리아와 10명 남짓한 아이들. 꼭 너희들 안에 잔존하고 있는 햄릿에 대해 써보구 나중 보내줘. 정말 읽어보고 싶어.
분홍공주 이제 초등 저학년인 ***은 오빠들 사이에서 자분자분 조용히 그림을 그리누나. 작고 뽀얀 손이 왔다갔다 하는, 꼬맹이 아가씨는 눈꼽쟁이 화분에 심긴 스노우드럽snowdrop 같아.
특히 페르소나를 상황에 맞게 잘 바꾸는 사람이 인격자라는 걸 캐릭터character와 함께 설명해 주셨다. 부디 가면을 잘 바꿔 쓰지 못해 인격 파탄자가 되지 말기를.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일찌기 나는’
발레리아는 쌀국수 냄새 촐촐하던 베트남노상식당 간판을 떼고 어떤 새로운 ** 문화 아카데미 간판을 걸지 고민 중이다. 성녀 발레리아의 묘비에 새겨져 있을 생몰년도 (?~?)에 루머처럼 떠도는 도깨비불을 채집해 이 현실의 발레리아는 어떤 존재하지 않는 불목하니의 아궁이에 그걸 넣어두려는 것일까.
*아서 해커Arthur Hacker, imprisoned spring
#최승자시인#햄릿#한국외대박우수교수님#이시대의사랑#학교밖아이들